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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스크랜튼과 일본 스크랜튼 가족이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885년 2월 초였다 스크랜튼은 함께 한국으로 나갈 아펜젤러 부부를 만났다. 스크랜튼보다 두 살 아래인 아펜젤러는 드루신학교 출신으로 1884년 12월 20일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의 교육선교 개척자로 임명을 받고 1885년 1월 14일 드루신학교 환송예배에 참석한 후 한 달 전에 결혼한 아내(Ella Dodge)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있었다. 아펜젤러는 1885년 2월 3일, 이들 선교사 일행이 한국을 향하여 출발하던 날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국에서 스크랜튼 가족과 아펜젤러 가족, 모두 6명이 한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이후 한국에서 병원과 학교 사업을 통해 선교를 개척했다. 이들 개척 선교사들은 태평양.. 더보기
스크랜튼의 집안 배경 월리엄 벤튼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은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William Falcott Scranton)는 오래전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영국 이민 후예로 뉴헤이븐에서 제조업을 하던 평범한 사업가였다. 반면 어머니(Mary Fletcher Benton, 1832-1909)는 미국 메사추세츠의 전통 있는 감리교 ‘벤튼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Erastus Benton)와 동생, 조카도 감리교회 목사였다. 이런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일찍부터 목회와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뉴헤이븐의 스크랜튼과 결혼하여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1872년 남편과 사별하였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스크랜튼은 홉킨스중학교.. 더보기
감리교회 선교 초기 한국 감리교회 선교는 두 개 축으로 추진되었다. 엘리트 선교(Elite mission)와 민중 선교(Minjung mission)가 그것이다. 그것은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 사회가 두 계층, 즉 양반과 민중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5백년을 지배해 온 봉건적 사회 질서에서 두 계층 사이에 교류와 공존이 불가능했기에 선교사들도 두 계층을 따로 만나 복음을 전해야만 했다.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 엘리트 선교는 잘 알려진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주도하였다. 그는 1885년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정동에 배재학당(培材學堂), 말 그대로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를 세우고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고’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영어와 서구 학문 분 아니라 .. 더보기
스크랜튼 모자가 한국 선교사로 나오기전 마지막 살았던 곳- 클리블랜드 클리블랜드는 스크랜튼 모자가 한국 선교사로 나오기전 마지막 살았던 곳이다. 스크랜튼이 1882년 뉴욕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어머니와 함께 클리블랜드에서 개업하고 있다가 1884년 12월 한국 개척 선교사로 임명을 받으면서 떠난 미국의 마지막 거주지이다. 지난 해 여름에는 스크랜튼의 출생지인 뉴헤이븐을 방문해서 그곳 예일대학 역사자료실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 볼수가 있다. 클리블랜드의 유적 1) 스크랜튼 모자가 클리블랜드에서 살던 집 터, 2) 스크랜튼이 개업한 병원 자리, 그리고 3) 스크랜튼 모자가 출석했던 교회 집 터와 병원 터는 모두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고 이들 모자가 출석했던 교회(First Methodist Church of Cleveland)도 다른 교회와 병합되어 이들이 출석했을 당시 교.. 더보기
최초의 권서 서상륜은 1882년 10월 영국성서공회에 의해 한국 교회사상 최초의 권서로 임명되어 많은 성경을 짊어지고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압록강 세관에서 갖고 간 성경은 모두 빼앗기고 검사관의 호의로 몸만 빠져 나와 고향 의주에 돌아온 후 전도하였다. 그러나 서상륜이 기독교를 전도한다는 사실이 관가에 알려져서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므로, 그는 삼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장연(長淵)의 갯마을 송천(松川, 솔래 또는 소래)으로 도피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 가서도 열심히 전도하여 결신자를 얻게 되었다. 서상륜에 의해 솔내에는 조그만 초가집을 예배당으로 정하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한국 개신교회의 첫 번째 교회가 되었다. 후에 솔래는 58세대 중 50세대가 예수를 믿었고 1895년 예배당까지 마련했는데 이 예배당이 장.. 더보기
포항대송교회 * 포항대송교회가 1901년 포항지역(포항시 승격 이전 영일군)에 개신교 교회역사로는 최초로 세워지다. 19세기말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동학란이 일어나고 당파싸움이 벌어지고 친일파, 친러파로 갈리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곳 동해바다 영일만 대송면 넓은 들, 그리 크지 않는 괴동 마을에 살던 박군현氏는 일본에 가서 머무는 동안 그리스도 복음을 접하며 자기 집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이 1901년 대송교회 전신인 괴동교회의 출발이었다. * 황해도에 한국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가 세워졌다면, 포항에는 동해안 지역 최초의 교회 괴동교회(현 대송교회가 있다. 두 교회는 바로 한국인이 중국과 일본에서 복음을 접하고 세운 교회라는 점, 외국인 선교사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이 세운 자생적인.. 더보기
윤치호 장로 윤치호는 유교가 조선의 정신을 맷돌로 갈아버렸다면서 철저하게 경멸했고, 승려가 되는 이유는 딱 하나, 가난 때문이라고 믿었다. 동학 의병의 궐기에 공포를 느꼈고 경계해마지 않았다. 그의 희망은 기독교였다. 조선을 파멸로부터 구하는 길은 하루빨리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100년 사이 윤치호의 바람은 이 땅에서 충분히 성취되었다. 종교라는 이름을 들이대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속물적인 삶의 방식을 예찬하고, 힘과 금전을 숭배하며, 극우 이념을 선동하는 한국의 기독교. 이 나라는 한나라당 대표 홍준표의 어법을 빌자면, '사실상'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 대통령께서 오늘날 기독교의 정직한 얼굴을 이렇게 잘 그려 주셨다. '나는 꼼수다'에서 들었던 '가카'의 육성이다. 장로가 시장이 .. 더보기
상동교회 전덕기 서울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던 전덕기 목사. 기독교 신앙과 구국운동을 하나로 묶어 한말 민족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일진회를 앞세워 '보호조약' 체결 공작을 벌이자 서울시내에서 대대적인 반대 운동이 열렸다. 구국기도회와 '도끼 상소'(상소를 들어주지 않으려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뜻), 가두시위로 이어지는 을사조약 반대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상동청년회 회장이었던 전덕기 목사였다. 우리나라의 두 번째 감리교회인 서울 상동교회(1888년 설립)를 기반으로 한말(韓末)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전덕기(全德基·1875~ 1914) 목사의 기념사업이 시작됐다. 4일 서울 중구 남창동 상동교회(담임목사 서철)에서 발족한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년 추모사업회'는 .. 더보기
언더우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에는 물론 전도활동에도 열심을 내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New Jersey) 주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되었.. 더보기
알렌, 한국에 자리를 잡다 알렌이 한국에 와서 처음 겪은 시련, 즉 갑신정변과 민영익을 치료한 사건은 그가 한국에서 자리 잡는 데 지대한 도움이 됐다. 민영익의 치료 현장에서 알렌에게 적대감을 보였던 한의사들은 후에 알렌을 만나 반가워하며 그때의 수고를 칭찬했다. 심지어 그들 자신도 알렌에게 와서 치료를 받았다. 알렌의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했다. 그가 쓴 일기나 회고의 글에는 “한국인은 천성이 양반 같고, 인정이 자상하며 성실하다”는 표현이 도처에 나타나 있다. 청국의 군인들도 알렌을 ‘예수박사’라 부르면서 알렌의 희생적 의료 봉사에 감사해 했다. 만나면 허리를 굽혀 큰절을 하기까지 했다. 청국공사관의 공의로까지 초빙된 것을 보면 알렌의 인기가 국제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조정과 온 백성들에게 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