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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선교역사

스크랜튼과 일본

스크랜튼 가족이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885년 2월 초였다

 

스크랜튼은 함께 한국으로 나갈 아펜젤러 부부를 만났다.

스크랜튼보다 두 살 아래인 아펜젤러는 드루신학교 출신으로 1884년 12월 20일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의 교육선교 개척자로 임명을 받고 1885년 1월 14일 드루신학교 환송예배에 참석한 후 한 달 전에 결혼한 아내(Ella Dodge)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있었다.

아펜젤러는 1885년 2월 3일, 이들 선교사 일행이 한국을 향하여 출발하던 날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국에서 스크랜튼 가족과 아펜젤러 가족,

모두 6명이 한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이후 한국에서 병원과 학교 사업을 통해 선교를 개척했다.

 

이들 개척 선교사들은 태평양을 건너 2월 21일 일본에 도착했다. 반년 전 서울을 방문하여 고종으로부터 ‘선교 윤허’를 얻어냄으로 스크랜튼과 아펜젤러의 한국행을 가능케 만들었던 매클레이가 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스크랜튼이나 아펜젤러는 곧바로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국내 상황이 좋지 않았다. 두 달 전(1884년 12월 3일)에 일어난 갑신정변 여파 때문이었다. 고종의 선교 윤허를 끌어내는데 기여한 바 있는 김옥균을 중심한 급진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켜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적 정부를 수립했으나 ‘3일 천하’로 끝나고 오히려 수구 보수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독교에 우호적인 진보세력이 축출당하고 만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선교사들이 서울에 들어가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스크랜튼과 아펜젤러 가족은 일본에 머물러 국내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또 다른 예비된 은총이었다. 의사로 있다가 갑자기 선교사로 나오게 된 스크랜튼도 그랬지만 아펜젤러도 선교 후보지인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펜젤러는 신학교 재학시절 해외 선교를 결심했지만 졸업할 당시까지 후보지를 일본으로 생각하고 준비하다가 갑자기 한국으로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한국은 미지의 나라였다. 그런 상태로 일본에 도착한 개척 선교사들은 내한이 늦춰지자 비로소 ‘한 숨 고르면서’ 한국 선교를 준비하는 마음의 여유를 얻었다.

당시 도쿄에는 이수정(李樹廷)이란 양반 출신 교인이 있어 그를 통해 국내 정치, 종교 상황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1882년 10월 농학을 배우러 일본에 왔다가 복음을 접한 후 6개월 만에 세례를 받고 유학생들에게 전도하여 한국인 집회를 이끌면서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한편,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교회에 “한국에도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냄으로 ‘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이란 별명이 붙었던 인물이다.

이수정은 스크랜튼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기 직전 요코하마에서 한글 <마가복음>을 인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당시 도쿄에는 갑신정변 실패 직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과 서재필, 서광범 등 개화파 지도자들이 있어 스크랜튼과 아펜젤러는 이들로부터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웠다. 개척 선교사들의 내한 지연기간은 부족했던 학습과 준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