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이후 국내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된 기미를 보이자 일본에 있던 선교사들은 입국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아펜젤러가 1진, 스크랜튼이 2진을 맡기도 하였는데 그에 따라 아펜젤러가 부인과 함께 1885년 3월 23일 요코하마를 출발, 고베(이곳에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합류했다)와 나가사키, 부산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에 인천에 도착하여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곧바로 서울에 들어가지 못했다. 인천 도착 직후 서울의 미국 공사나 인천항에 정박하고 있던 미군 함대 함장으로부터 “아직 서울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서양 여인의 등장이 한국 군중을 흥분시킬 수도 있다.”며 아펜젤러 부인의 서울행을 강력하게 만류하는 바람에 아펜젤러 부부는 닷새 만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반면 독신이었던 언더우드는 서울로 곧장 들어갔다).
결국 감리교 개척선교사들의 내한 시도는 반만 성공한 셈이 되었다. 아펜젤러 부부의 귀환은 일본에 남아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특히 아펜젤러 부인은 자신 때문에 남편이 서울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그렇다고 좌절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예정대로 2진 스크랜튼을 출발시키되 이번에는 혼자 떠나기로 했다. 그리하여 스크랜튼은 4월 20일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역시 나가사키와 부산을 거쳐 5월 3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한 달 사이 서울 분위기는 크게 바뀌어 있었고 의사인 스크랜튼의 내한을 미국 공사도 크게 환영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스크랜튼은 곧바로 서울에 들어가 정동에 선교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런 준비 작업 끝에 아펜젤러는 일본에 남아 있던 나머지 여성 선교사들을 인솔하고 6월에 들어와 합류하였다.
이처럼 감리교 선교역사에서 아펜젤러가 한국의 문을 열었다면 서울의 문을 연 것은 스크랜튼이었다.
살 던 곳과 하던 일이 서로 달랐지만 아시아의 마지막 은둔국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신앙적 동기 하나로 한 배에 탄 두 개척 선교사의 아름다운 협력을 바탕으로 한국 감리교회 선교의 문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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