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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선교역사

청도 복음의 시작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 쪽복음서가 청도에 배포되기 시작, 불 붙듯 확산 http://leadersrich.com/mct/7days/log.asp?ct_id=dunamjin 청도지역에서 기독교 역사는 배위량(W. M. Baird)선교사로부터 시작한다. 배위량(W. M. Baird)선교사가 쪽복음서를 나누어 준 것은 1893년이다. 선교사 일행에 조선인 서경조 조사와 마부인 박재룡 소년이 함께 했다. 불교와 유림의 고장 청도---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그 해 4월 21일 기록에 의하면 부산을 떠나 밀양을 지나 청도와 밀양사이 유천역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금요일 정오에 청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많은 쪽복음서를 나눠주었다. 안동 비봉교회(1902년 설립) 김수영씨가 청도에서 배위량선교사에게 전도지를 받았다... 더보기
포항지역의 개척 1908년 1월 5일 포항교회를 조직하여 중앙동 451번지에 초가 3간을 구입하고 교회당을 설치한 것이 오늘날 포항제일교회의 전신이 된 것이다. 당시 당회장 맹의와 목사, 조사 황경선 ·김순여, 영수(교회의 대표자로서 선교사 부재시에 교회의 제반 일을 총괄했던 안수 받지 않은 장로격임) 이찬유, 집사 남문오가 시무하였다. 이때 통영에서 온 김상오가 개척활동에 열성을 다하였는데 1910년 초가 5간을 구입하여 예배당을 확장하였다. 1911년에는 포항교회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사립 영흥학교를 설립하고, 황경선 조사를 파송하여 칠포교회를 개척하였다. 1905년 안의와(James E Adams)목사와 서성오·김상오가 이 고장에 와서 전도한 후 1906년 맹의와 선교사가 포항지방 담당 순회선교사로 왕래하면서 포항.. 더보기
한국에 대한 선교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발을 들여 놓았던 프로테스탄트교인은 네덜란드인 벨트브레(박연)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귀화하여 오래 사는 동안에 선교에 관한 것에는 관심조차도 두지 않았다. 그후 같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저 유명한 하멜이 한국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장로교인으로서 한국의 종교 관해서 나름대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였으나, 실질적으로 기독교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1832년 7월 동인도 회사 소속의 암허스트호를 타고 황해연안을 답사하러 왔던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의 구츨라프 목사가 있다. 그는 이 땅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에게 성경을 주면서 “가난한 나라, 자연을 가꾸지 못한 이 나라가 복음과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부요해 지기를”기도하였다. 그는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답사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 더보기
최초의 선교사들 감리교회로 전향한 아펜셀러가 처음으로 언더우드를 만난 것은 커넷티컷에서 열린 “신학교연합회”에서 였다. 그는 이 학회에서 눈에 띄게 활약하는 총명한 청년 언더우드를 잊을 길이 없었고, 그후 그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을 때까지 선교의 동역자로 운명을 같이 하였다. 아펜셀러는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벽안의 땅에 와서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헌신한 위대한 선교사였다. 미국의 남장로교회가 선교사를 한국에 계속해서 파송하기로 한 것은 언더우드선교사가 네쉬빌에서 열린 신학교 협의회에서 행한 열정적인 설교와 선교보고를 들은 교단의 외국선교부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선교부의 실행위원회는 1891년 12월 세 명의 청년의 한국행을 승인하고, 4명의 여자도 함께 한국으로 나갈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1892년에.. 더보기
베어드 선교사 가족 윌리엄 M 베어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대구지역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으며, 평양에서는 장로교 최초로 숭실대학을 설립한 윌리엄 M. 베어드는 1891년 2월 1일 인천에 도착하여 그해 9월부터 부산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1895년에는 대구로 옮겨 대구제일교회와 계성학당(계명대)을 설립하고, 1896년 서울로 옮겨 경신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97년 10월에는 평양에서 숭실학교를 창설하고, 교장에 취임한 후 1906년 9월 감리교와 연합하여 숭실대학으로 발전시켰다. 근로와 자조정신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 교육에 전념하였을 뿐만 아니라 네비어스 선교방법을 한국실정에 맞게 적용하여 자립, 자치, 자족에 기초한 선교 정책을 입안하였다. 숭실대학장을 사임한 후에는 교재 발간 등의 문서선교에 .. 더보기
계명대의 뿌리 “계명대는 모두 다섯 개의 캠퍼스를 가지고 있다. 1898년 부지매입을 시작한 동산캠퍼스, 1954년부터 조성한 대명캠퍼스, 1978년의 성서캠퍼스와 근년에 마련한 칠곡 동영캠퍼스, 현풍캠퍼스가 그것이다. . 1897년 11월 1일 대구에 온 안의와(Rev. Dr. James E. Adams, 1867~1929) 선교사는 그해 12월 25일에 대구에 합류한 장인차(Dr. Woodbridge O.Johnson, 1869~1951) 의료선교사와 함께 1899년 12월 24일 오늘의 계명대 의과대학 부속 동산병원의 전신인 濟衆院과 ‘미국약방’을 지금의 대구 약령시장 내 제일교회 자리에 개원했으나, 급증하는 환자와 고약한 냄새, 소음 등 어려운 입지조건을 해소하기 위해 성 밖 동산에 새 터를 마련했다. 그것이 .. 더보기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의와’ 아담스 선교사의 소중한 생애와 발자취를 담은 책이 나왔다. 안의와 선교사의 행적은 최근 간행된 〈겨자씨 속에 담은 천국〉(김중순·김병희 글. 소통)에서 만날 수 있다. 안의와 선교사는 1867년생으로 1895년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받고 그해 5월 부산에 도착했다. 1896년 11월 대구선교 업무를 인계 받았다. 대구 선교를 부여받은 안의와 선교사는 1897년 대구 부임과 동시에 대구·경북 최초의 교회라 할수가 있는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했다. 대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처처에 전도여행을 하며 수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1906년에는 계성학교를 설립했다. 안의와 선교사는 1918년 건강악화로 미 북장로회 한국선교사를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1920년 9월 대구에 다시 돌아와 독.. 더보기
흥해교회 1905년 5월 1일 이춘옥·김균옥·김성옥(김상현)등이 대구 합동 공의회 맹의와 선교사로부터 파송을 받은 이기우에게서 복음을 받아 김균옥 집에서 첫 예배를 가지면서 시작이 되는데 초대 교역자는 서성오였다. 1908년 2월에 약성동의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으며, 초대영수는 이춘옥이었다. 1910년 2대영수로 최기영이 피선되고, 1912년 3월 중성1동으로 교회를 이전하여 김문여 전도사가 2년간 시무하고, 1914년 3월 중성동 소재 대지 250평에 40평 목조건물로 금석문 전도사가 2년간 시무하였다. 1916년 2월 박문찬 목사가 부임하여 9년간 시무하였으며 , 1917년 5월에 교회부설 학교인 명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20년 3월 김만성 전도사가 부임하고, 1922년 김대현, 송문수가 .. 더보기
포항교회 1905년 안의와(James E Adams)목사와 서성오·김상오가 이 고장에 와서 전도한 후 1906년 맹의와 선교사가 포항지방 담당 순회선교사로 왕래하면서 포항지역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1908년 1월 5일 포항교회를 조직하여 중앙동 451번지에 초가 3간을 구입하고 교회당을 설치한 것이 오늘날 포항제일교회의 전신이 된 것이다. 당시 당회장 맹의와 목사, 조사 황경선 ·김순여, 영수(교회의 대표자로서 선교사 부재시에 교회의 제반 일을 총괄했던 안수 받지 않은 장로격임) 이찬유, 집사 남문오가 시무하였다. 이때 통영에서 온 김상오가 개척활동에 열성을 다하였는데 1910년 초가 5간을 구입하여 예배당을 확장하였다. 1911년에는 포항교회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사립 영흥학교를 설립하고, 황경선 조사를 파송하.. 더보기
자천교회 권헌중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