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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선교역사

스크랜튼의 집안 배경 월리엄 벤튼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은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William Falcott Scranton)는 오래전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영국 이민 후예로 뉴헤이븐에서 제조업을 하던 평범한 사업가였다. 반면 어머니(Mary Fletcher Benton, 1832-1909)는 미국 메사추세츠의 전통 있는 감리교 ‘벤튼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Erastus Benton)와 동생, 조카도 감리교회 목사였다. 이런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일찍부터 목회와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뉴헤이븐의 스크랜튼과 결혼하여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1872년 남편과 사별하였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스크랜튼은 홉킨스중학교.. 더보기
감리교회 선교 초기 한국 감리교회 선교는 두 개 축으로 추진되었다. 엘리트 선교(Elite mission)와 민중 선교(Minjung mission)가 그것이다. 그것은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 사회가 두 계층, 즉 양반과 민중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5백년을 지배해 온 봉건적 사회 질서에서 두 계층 사이에 교류와 공존이 불가능했기에 선교사들도 두 계층을 따로 만나 복음을 전해야만 했다.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 엘리트 선교는 잘 알려진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주도하였다. 그는 1885년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정동에 배재학당(培材學堂), 말 그대로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를 세우고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고’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영어와 서구 학문 분 아니라 .. 더보기
스크랜튼 모자가 한국 선교사로 나오기전 마지막 살았던 곳- 클리블랜드 클리블랜드는 스크랜튼 모자가 한국 선교사로 나오기전 마지막 살았던 곳이다. 스크랜튼이 1882년 뉴욕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어머니와 함께 클리블랜드에서 개업하고 있다가 1884년 12월 한국 개척 선교사로 임명을 받으면서 떠난 미국의 마지막 거주지이다. 지난 해 여름에는 스크랜튼의 출생지인 뉴헤이븐을 방문해서 그곳 예일대학 역사자료실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 볼수가 있다. 클리블랜드의 유적 1) 스크랜튼 모자가 클리블랜드에서 살던 집 터, 2) 스크랜튼이 개업한 병원 자리, 그리고 3) 스크랜튼 모자가 출석했던 교회 집 터와 병원 터는 모두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고 이들 모자가 출석했던 교회(First Methodist Church of Cleveland)도 다른 교회와 병합되어 이들이 출석했을 당시 교.. 더보기
최초의 권서 서상륜은 1882년 10월 영국성서공회에 의해 한국 교회사상 최초의 권서로 임명되어 많은 성경을 짊어지고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압록강 세관에서 갖고 간 성경은 모두 빼앗기고 검사관의 호의로 몸만 빠져 나와 고향 의주에 돌아온 후 전도하였다. 그러나 서상륜이 기독교를 전도한다는 사실이 관가에 알려져서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므로, 그는 삼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장연(長淵)의 갯마을 송천(松川, 솔래 또는 소래)으로 도피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 가서도 열심히 전도하여 결신자를 얻게 되었다. 서상륜에 의해 솔내에는 조그만 초가집을 예배당으로 정하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한국 개신교회의 첫 번째 교회가 되었다. 후에 솔래는 58세대 중 50세대가 예수를 믿었고 1895년 예배당까지 마련했는데 이 예배당이 장.. 더보기
언더우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에는 물론 전도활동에도 열심을 내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New Jersey) 주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되었.. 더보기
알렌, 한국에 자리를 잡다 알렌이 한국에 와서 처음 겪은 시련, 즉 갑신정변과 민영익을 치료한 사건은 그가 한국에서 자리 잡는 데 지대한 도움이 됐다. 민영익의 치료 현장에서 알렌에게 적대감을 보였던 한의사들은 후에 알렌을 만나 반가워하며 그때의 수고를 칭찬했다. 심지어 그들 자신도 알렌에게 와서 치료를 받았다. 알렌의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했다. 그가 쓴 일기나 회고의 글에는 “한국인은 천성이 양반 같고, 인정이 자상하며 성실하다”는 표현이 도처에 나타나 있다. 청국의 군인들도 알렌을 ‘예수박사’라 부르면서 알렌의 희생적 의료 봉사에 감사해 했다. 만나면 허리를 굽혀 큰절을 하기까지 했다. 청국공사관의 공의로까지 초빙된 것을 보면 알렌의 인기가 국제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조정과 온 백성들에게 한.. 더보기
알렌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영세한 호텔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알렌은 타월로 감싼 베개를 베고 당구대 위에서 밤잠을 겨우 잤다. 아침 요기는 숯불로 구운 닭고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8시에 조랑말을 타고 떠나 오후 5시에 한강변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서의 첫날밤을 청계천 언저리의 오막살이집에서 지냈다. 다음 날 알렌은 미국공사 푸트에게 인사하려고 미국공관을 찾아갔다. 신기하게도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웃고 손을 내밀며 놀라울 정도로 알렌을 반겨줬다. 당시 미국 군함 트렌톤 호가 민영익이 속한 보빙사 일행을 태우고 한국에 왔다는 소식이 장안에 자자했고, 서울에 머무는 해군 군인들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도처에 걸리는 등 장안이 축제 분.. 더보기
한국행을 결심한 ‘의사’ 알렌 경험이 일천한 26세 청년 의사로서는 이런 일들이 너무 힘들었다. 그때 중국 상하이에 머물던 미국인 의사 친구들이 “한국에 가보라”고 권유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는 외국인이 꽤 있으니 의사로 개업하면 생업으로 전망이 밝다는 그런 권유였다. 친구들은 “수입 면에서도 유리하다”는 권고를 숨기지 않았다. 그 당시 한국에는 조정에서 세관·외교·경제·산업·군사 등 여러 면에서 막강한 권세를 부리고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라는 사람이 있었다. 알렌의 친구는 그에게 소개장을 써줄 터이니 한국에 가보라고 권했다. 알렌은 ‘의사’라는 직함을 지닌 채 미지의 나라 한국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한국교회가 1909년 선교 25주년을 기념할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한국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축전.. 더보기
한국을 스쳐간 알렌 이전의 선교사들 알렌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를 계속하도록 처음 길을 튼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다. 그런데 그 이전에 우리나라를 스쳐간 서양 선교사들은 꽤 많았다. 가장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영국 웨일스의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있다. 1866년 초가을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했는데, 김일성의 할아버지가 칼을 들어 쳤다고 북한에서 떠드는 그런 사람이다. 토마스 목사가 자라고 그의 아버지가 목회하던 영국 웨일스 하노버 교회 담임을 한국인 유재연 목사가 맡았다는 국민일보의 최근 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네덜란드인 귀츨라프도 있었다. 1832년 여름 제주도를 거쳐 흑산도 앞바다까지 왔다가 제주도를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삼을 만하다고 장담하고 떠났던 사람이다. 그는 홍콩에 갔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는데, 홍콩은 그의 말대로 세.. 더보기
알렌의 거대한 역할 알렌은 한국에서 근대식 병원과 학교를 처음 시작했다. 또 조정과 가까워지면서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할 수 있도록 돕는 ‘입국통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한국에서 안련(安連)이라 불렸는데 묘하다. 선교사들 입국의 길을 ‘안전하게 연결시켜 주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조정과 아주 친근하게 지내게 되고, 고종을 도와 한국이 국제사회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입국한 지 6년 만에 미국 외교관으로 신분을 바꾼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국가 신분을 잃어 공사직에서 해임되고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 끝까지 한국을 위해 근대화 사역과 반일 친한의 강경책을 밀고나가는 데 앞장선다. 알렌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 초창기부터 우리 곁을 지켰다. 우리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 더러는 동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