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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선교역사

첫 서양선교사 알렌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그는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4년 9월 20일 인천에 도착했던 한국 최초의 서양선교사다.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그리고 1905년 6월 9일 그의 나이 47세 때 한국을 떠나 미국 토레도시에 살다가 1932년 12월 11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만 21년을 머문 셈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 가운데 황금기는 한국에서 보낸 21년이었다. 그 외 여생은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 역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과 외교 사역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세상에 왔다가 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미 관계의 시작 광화문 거리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나는 그 건너편에 알렌의 동상을 세울 수 있다는 .. 더보기
스크랜튼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에서 희망의 문을 여시는 분이다. 이것을 고백할 수 있었던 선교사가 있으니, 바로 메리 스크랜톤 여사 스크랜튼은 40세에, 사랑했던 남편을 잃었다. 한국개신교 선교사업이 시작되는 즈음에 하나님은 그녀를 위로하시며 미감리교회 한국최초의 여선교사로 세우셨다. 그녀의 아들 역시 미감리회 한국최초의 의료선교사로 부르심으로써 복에다 복을 더하신 것이다. 1885년 6월 20일 서울에 도착한 그녀는, 곧 정동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준비하며 여성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스크랜튼은 1886년 5월 31일, 자신의 거처에서 한 명의 여학생을 놓고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나는 가난한 고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즉시 내 비좁은 사실에 한 명을 수용하 기로 결정하였다”라는 당시 그녀의 기록이, 한국.. 더보기
언더우드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행한 주된 활동은 교육선교였다. 그는 교육 자체가 선교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교육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원자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학생으로 삼았다. 하지만 다수의 동료 선교사들은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선교라고 보고 교육은 간접적인 활동이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경영하는 학교에는 기독 신자만 입학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실행했다. 언더우드는 애초에 교사 자격으로 입국했고 실제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며 활동을 시작했다. 입국 2개월 후부터는 그의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공개적으로 전도하러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조용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소임을 다했다. 1886년 5월부터는 정부의 허가.. 더보기
스크랜튼 뉴욕대학에서 의과학을 공부하고 클리브랜에서 개업을 하고 있던 스크랜튼이 감리교선교사로 임명받자 평소 선교사업에 뜻을 두고 있던 그의 어머니 스크랜튼 부인도 아들과 함께 일하기로 결심하고 1885년 6월20일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한국에 도착하였다. [메리 스크랜튼] 스크랜튼 부인의 본명은 메리 프리쳐 벤톤이며 1832년 12월9일 매사츠세츠 벨쳐타운에서 태어났으며 1853년 W.T스크랜튼과 결혼하였고 1872년 사별하였다. 그녀는 외아들과 같이 다니며 선교를 하다가 52세의 나이로 한국에 왔으며 1909년 10월8일에 하나의 품으로 갔다. 1886년 5월31일 한명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은 한국 최초의 여성 신교육의 뿌리이다 그는 유교적인 질서속에 얽매여 있는 여성을 위한 교육이 시급함을 절감한 그녀는 한국..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