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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선교역사

영천 제일 교회 영천 제일 교회는 1904년 4월 10일 아담스[안의와] 선교사의 인도로 화룡동에 있는 배선달의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때 박수근등 2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후 1918년 화룡동에서 현재 교회의 위치인 성내동으로 옮기면서 교회이름을 ‘성내동 예배당’이라 하였고 1923년에는 ‘영천 교회’로, 1937년에 ‘영천읍 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56년에 현재의 이름인‘영천 제일 교회’로 변경되었다. 더보기
포항지방의 기독교 포항지방의 기독교 우리나라에서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85년(고종 22)경 부터이다. 1885년 우리나라가 구미제국과 수교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가문호를 개방하여 외국인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어 개신교는 그 포교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1885년 미국 북장로 교회의 선교사 언더우드(H.G.Underwood)와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a)가 인천에 상륙하면서부터 주로 미국계 신교의 각 교파에 속하는 많은 선교사가 입국포교 하였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미국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교회 양식을 본받게 되었으며, 개신교는 정식 국교를 통하여 들어왔기 때문에 사교로 오인될 위험이 없었.. 더보기
장흥교회와 합병 1921년 신축한 함석지붕의 교회가 1950년 6.25사변 당시 크게 파손이 되었습니다 1953년 160평의 대지에 파손된 교회를 고치고 100평 규모의 기와지붕으로 증축합니다 종각도 규모가 쿤 것으로 세웁니다 자료출처 한국기독교회사 1923년 초가삼간을 매입 기도처로 사용합니다 일제치하에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해 이 기도처에서 새벽과 밤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한일합방후 3.1운동의 여파로 불가항력적인 기독교 말살정책에 의해 교회는 고난과 역경을 수 없이 당하면서도 종소리는 계속 울려 펴졌고 불이 꺼지지 않으면서 민족혼을 일개우는 사명을 다해왔습니다 1901년부터 1969년까지 약 70년간을 영일만(포항시가 되기 이전 ~ 포항시가 되기 까지)지역에서 사명을 감당해 왔고 그 후 괴.. 더보기
괴동교회의 변천 위치는 현재 포항제철본사와 괴동역 사이이다. 그후 함석건물 기와건물 벽돌건물 콘크리트의 뼈대로 세워진 외벽이 붉은벽돌(현 건물)등으로 변천된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박군현은 서양에서 건너온 기독교문화의 영향으로 일본이 발전했고 신청년들을 길러냈다는 사실을 개닫게 된다 복음을 받아들인 박군현은 귀국하자마자 고향마을인 영일군 대송면 괴동리에 교회를 세웁니다 당시 박문찬 안종덕 김동수 황경선 등 이웃 친지와 친구들 또 부인과 아이들까지 합하여 27명을 전도해 예배를 드리고 경북 동해안 일대에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표항대송교회의 전신인 괴동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러다가 1902년에는 교회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천주교인들이 믿지않는 자들의 비판을 받는 중에 교회까지 핍박을 받게 되어 대댜수의 교인들이 낙심하고.. 더보기
괴동교회 19세기말 이곳 동해바다 영일만 대송면 넓은들의 괴동마을에 살던 박군현씨는 일본에 가서 머무는동안 그리스도 복음을 접하였다. 이후 박군현씨는 자기집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하여 1901년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괴동교회의 출발이다. 이후 괴동교회는 대송교회로 발전하게 된다. 황해도에 한국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가 세워졌다면 포항에는 동해안지역 최초의 교회 괴동교회(현 포항대송교회)가 있다 두 교회는 바로 한국인이 중국과 일본에서 복음을 접하여 세운 교회라는 점입니다 외국인선교사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이 세운 자생적인 교회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더보기
조분이, 김태하 성도 조분이, 김태하 성도는 1904년 3월 17일 교회를 세우기도 뜻을 모으고 기도회를 가졌으며 신자가 증가함에 따라 1905년에는 김태하 성도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05년 김태하 성도의 소유 밭 500평에 예배당을 지었으며 중간에 간을 두어 남녀 좌석을 구별하여 예배를 드렸는데 기록에 따르면 1905년 어도만 선교사가 설립하고 김성삼 조사와. 김태하 성도가 영수(요즘 장로로), 이종태 성도가 집사로 시무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10년에 신자의 수가 50명으로 증가하자 동천동 이종태 성도 소유의 땅에 10간의 교회를 신축하여 성장하여 나갔고 1911년에는 총회가 조직된 후에는 경상노회에 소속되어졌다 더보기
칠곡지역 선교 부해리 선교사의 전도하는 모습 칠곡지역 선교는 부해리 선교사가 당나귀를 타고 조야동 뒷산 고개(요즘은 팔달교, 매천대교, 국우터널 등이 있다)을 넘어 팔거들을 지나다가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부인에게 “야소(예수)를 믿으십시요”라고 전했을 때 한 부인이 “야소를 믿으면 병이 났습니까?” “예 그렇습니다.”“야소를 믿으면 내 병도 고칠 수 있습니까?” “예 야소를 믿으면 무슨 병이든지 고칠 수 있지요” 이 부인이 바로 ‘조분이’ 성도이다. 이 부인은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중이었다. 이 때가 1903년 3월이었다. 이후 조분이 성도는 김태하 성도와 함께 ‘남성정 교회’ 로 출석하게 되었다. 30리 길을 밥을 싸다니면서 신앙을 키워나갔다. 그 때 금호강에는 ‘외나무 다리(현 조야교)’ 밖에 없어서 비가 많이 오면 .. 더보기
경북 각지로의 선교 남성정교회의 설립이후 교세는 확장되어 갔는데 안의와, 부해리,맹의와,어드만 선교사가 경북의 각지역을 선교하였다. 안의와(아담수) 선교사와 서자명 조사--- 경산, 영천, 청도군을 담당하여 전도와 교회설립운동을 펼침 부해리(브루엔) 선교사와 김기원, 김영채, 이희봉 조사--- 선산, 군위, 김천, 칠곡군을 담당 맹의와(맥팔랜드) 선교사와 김호준, 서성오 조사--- 고령, 영일, 경주, 청송 지역을 담당 어드만 선교사와 김성삼 조사--- 군위, 의성, 선산지방을 담당하며 교회를 세움 더보기
배위량과 안의와 더보기
영천 자천교회 영천자천교회는 1903년에 건립이 되었으며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지금도 교회안에는 자천교회 설립자인 권헌중 장로묘가 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