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 감리교회 선교는 두 개 축으로 추진되었다. 엘리트 선교(Elite mission)와 민중 선교(Minjung mission)가 그것이다. 그것은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 사회가 두 계층, 즉 양반과 민중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5백년을 지배해 온 봉건적 사회 질서에서 두 계층 사이에 교류와 공존이 불가능했기에 선교사들도 두 계층을 따로 만나 복음을 전해야만 했다.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 엘리트 선교는 잘 알려진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주도하였다.
그는 1885년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정동에 배재학당(培材學堂), 말 그대로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를 세우고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고’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영어와 서구 학문 분 아니라 기독교 진리도 가르쳐 교계와 사회 지도자들을 배출했으니, 한말 이후 정부 관리로 혹은 교계 지도자로 활약한 최병헌과 이승만, 신흥우, 정교, 강매, 이교영, 송기용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렇게 배재학당을 통해 얻은 구도자와 개종자들로 교회를 시작한 것이 오늘의 정동제일교회다. 아펜젤러는 계속해서 1890년 종로 인사동에 책방을 열고 일반 서적과 함께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면서 복음을 전한 결과 그곳에서도 교회가 시작되었으니 오늘의 중앙교회가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펜젤러가 학교와 서점을 통해 엘리트 선교를 추진하던 같은 시기에 사회적 소외 계층, 경제적 빈민 계층을 대상으로 한 민중 선교도 추진되었으니 그 일을 맡은 이가 스크랜튼이다. 민중 선교가 엘리트 선교 못지않게 중요하고 그 결과도 상당하였지만 한국교회사에서 엘리트 선교사 아펜젤러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반면, 민중 선교사 스크랜튼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감리교회 안에서도 아펜젤러에 대한 연구와 저술, 그를 기념하는 행사와 사업은 많지만 스크랜튼 기념하는 행사는 거의 없다(몇 년 전 아현교회가 스크랜튼 흉상을 교회 안에 세우고 기념 강좌를 연 정도다). 역사는 균형 감각을 잃으면 안 된다. 엘리트 선교와 민중 선교는 함께 가야 한다.
소외된 민중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선교사, 한말과 일제시대 ‘민족운동의 선구자’ 전덕기 목사가 그처럼 닮고 싶어 했던 선교사, 스크랜튼의 이야기를 다시 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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