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랜튼은 1885년 5월 3일 인천에 도착하게 된다.
서울로 들어온 스크랜튼은
재동에 있던 알렌의 병원, 제중원에서
진료 활동을 시작했다.
스크랜튼은 한국말을 배우면서 자신과 일본에 있는 아펜젤러 가족이 들어와 살 집과 선교 부지를 구했다.
그는 미국 공사 주선으로 6월 중순 공사관 길 건너편에 한옥 기와집을 구입하여 이사한 후 9월부터 찾아오는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래쪽에 기와집 한 채를 더 구입하여 내부를 수리한 후 1886년 6월부터 대문에 ‘미국인 의사병원’이란 간판과 함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떤 병에 걸렸든지 매일 열 점 종에 빈 병을 가지고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란 안내판을 내걸고 환자들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스크랜튼의 병원이 자리를 잡아 갈 때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대부인도 정동에 들어와 교육 사업에 착수하였다. 1885년 4월 5일 인천까지 왔다가 서울 사정으로 인천에 한 주일 머물다 일본으로 철수했던 아펜젤러는 스크랜튼이 서울 정동에 선교부지를 확보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남아 있던 가족들을 이끌고 6월 20일 인천에 다시 도착하였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살 정동 집 수리가 예정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아펜젤러 부부는 인천에 한 달 가량 머물다가 7월 29일에야 서울에 들어와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그가 처음 한 일은 스크랜튼의 소개로 서양 의술을 배우려는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아펜젤러의 ‘영어 학생’들은 계속 늘어났다. 그 해 10월 아펜젤러는 한국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학교 설립인가를 얻었고 1886년 봄 정동 남쪽 언덕에 기와집 두 채를 사서 학교 건물로 개조한 후 6월 8일 정식으로 학교 문을 열었다. 이것이 한국 근대교육의 출발이 되었다.
같은 시기 스크랜튼의 어머니(대부인)도 정동에서 여성 교육의 장을 열었다. 아펜젤러와 함께 6월 20일 인천에 도착한 스크랜튼 대부인은 곧바로 서울로 들어와 아들 집에 머물면서 여학교 부지를 물색하다가 10월에 북쪽 언덕 일대 부지를 확보하고 거기에 있던 초가집 19채를 헐고 1년 공사 끝에 기숙사를 갖춘 ㄷ자 형 200여 칸짜리 기와집 교사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는’ 학생들로 인기를 끌던 아펜젤러의 남자학교와 달리 여학교는 학생 모집이 여의치 않았다.
“여자가 배워서 뭐하느냐.”는 식의 봉건적 사회분위기 때문에 딸을 서양인 학교에 보내려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다. 결국 6개월 뒤에야 ‘가난해서 집에서 굶겨 죽일 수 없어’ 학교에 버리듯이 보낸 딸 아이 하나로 학교를 시작하였다.
이로써 스크랜튼이 들어와 정착한 지 2년 만에 정동에는 남녀 학교와 병원이 설립되어 감리교 선교는 무난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고종 황제는 1887년 4월, 외부를 통해 아펜젤러의 학교엔 ‘배재학당’(培材學堂), 스크랜튼 대부인의 학교엔 ‘이화학당’(梨花學堂), 그리고 스크랜튼의 병원엔 ‘시병원’(施病院)이란 이름의 사액현판(賜額懸板)을 내림으로 감리교 선교 사업에 대한 정부 차원의 인가와 지지를 표하였다.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통해 얻은 구도자들을 중심으로 교회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1887년 가을 남대문 안에 한국 토착교인 집회를 위한 한옥(베델예배당)을 마련한 후 10월 9일 토착교인 4명으로 집회를 시작했으니 오늘 정동제일교회의 출발이다.
그리고 그 무렵 스크랜튼의 요청으로 내한한 여성 의사 하워드(M. Howard)가 정동에서 여성 전용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시작함으로 정동은 강력하고도 안전한 선교 거점이 되었다.
그런데, 스크랜튼은 이처럼 안전하고 편리한 정동을 떠나 불안하고 불리한 곳으로 선교 거점을 옮길 계획을 수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