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썸네일형 리스트형 영천 자천교회 영천자천교회는 1903년에 건립이 되었으며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지금도 교회안에는 자천교회 설립자인 권헌중 장로묘가 있다. 더보기 안두화(1895~1965)선교사 계명대학교 설립에 핵심적 역할을 한 안두화(1895~1965)선교사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파송으로 1879년 11월에 대구에 와서1906년 대구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계성학교를창설한 안의와(James Edward Adams)선교사의 아들이다. 안의와 선교사는 대구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한 베어드(William M. Baird)선교사의 처남으로 대구, 경북지역 최초의 교회인 남문안 교회(오늘날의 제일교회)를 세웠으며, 대구를 서울, 평양에 이은 전국 3대 기독교 선교 거점도시로 발전시켰다. 안의와 선교사의 업적을 이어 받은 아들 안두화 목사는 강인구 목사, 최재화 목사와 함께 1954년 2월 계명기독학관을 설립하였는데 1955년 2월 5일자로 문교부의 인가를 받으면서 오늘의 계명대학교로 발전을 하게된.. 더보기 애덤스 베어드 선교사는 서울로 발령을 받으면서 1897년에 처남인 애덤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 부부에게 대구지역 선교를 인계인수하고 서울로 떠나게 된다. 애덤스 목사는 대구를 서울 평양에 이은 3대 선교 거점으로 키웠을 뿐 아니라, 대를 이어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애덤스 목사를 기리는 비가 대구 제일교회 구교회 마당에 서있다. 애덤스 목사의 첫째 아들인 안두화 목사는 계명대를 설립 하였다. 차남은 대구 제일교회 사랑채에서 태어나 안동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떠났다 더보기 대구 선교의 시작 베어드 선교사는 1893년 4월에 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지며 대구의 선교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대구 제일교회의 시작이다. 이후 베어드 선교사는 서울로 발령을 받으면서 1897년에 처남인 애덤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 부부에게 대구지역 선교를 인계인수하고 서울로 떠나게 된다. 1897년 12월에는 존슨 선교사가 대구에 도착하였고 1899년에 대구제일교회 옆에 하인들이 쓰던 초가집을 개조하여 '미국약방'이라는 간판을 쓰고 약을 나누어주는데 이것이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병원인 제중원이다. 이후 제중원은 동산의료원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데 존슨선교사가 1899년에서 1910년까지 초대 병원장으로 활약을 했다. 더보기 청도를 거쳐 대구에 도착 “책 속의 진리를 전할 시간을 채 갖지 못했다.”고 베어드가 남긴 기록으로 보아 이번 경상도 전도여행은 본격적인 전도를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곧 다가올 미래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탐색 여행의 성격이 진하다. 일행은 일정보다 다소 늦게 밀양을 떠나 21일 오후 청도 삼거리에 도착했다. 밀양에서 청도까지 쉬지 않고 걸어온 베어드 일행은 청도 읍내의 널찍한 바위에서 잠시 쉬어간다. 바위 옆,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는 맑은 물이 감도는 깊은 소(沼)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수백 년은 됨직한 노거수와 샘까지 있어 주님의 종들이 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베어드 선교사가 택한 복음 여행길은 과거 선비들이 부산에서 밀양 청도 대구 문경새재 충청도를 거쳐 한양(서울)으로 다니던 '과거길'이자 조정에 공물을 운반.. 더보기 베어드의 경상도 선교 미국 북장로회 베어드(William M. Baird·배위량) 선교사는 경상도 지역의 선교에 올랐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0년에 한국으로 가서 선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선으로의 복음 전파가 시급한 상황에서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는 베어드 선교사는 한국을 향해 긴 여정에 올랐는데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하와이와 요코하마 고베 나가사키 쓰시마를 거쳐 1891년 1월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당시 한국에는 알렌 목사가 갑신정변 때 심하게 다친 민영익을 치료해준 공로로 황실 의사가 되어 있었으며 선교의 분위기도 비교적 자유로왔다. 부산 선교부를 배정받은 베어드는 2년 후에 대구를 포함한 경상도 북부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경북에서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말씀을 순수히 전할 수 있을까?” .. 더보기 초량교회 창립일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가 남긴 일기장을 통해 초량교회의 실제 창립연도가 밝혀져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베어드가 남긴 일기를 살펴보면 1894년 6월 4일에 부산지역에서 토착신자들이 최초로 예배를 드렸다 기록되어 있다." 초량교회는 창립일을 '1892년 11월'로 고수해 왔다. 그동안 초량교회는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는 아내의 산후조리가 끝나는 11월부터 자신의 집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집회형태를 갖게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초량교회의 최초의 예배가 되었다"라고 밝혀왔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되는 베어드의 1893년 6월 4일자 일기에는 "처음으로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함께 모였다. 참석자 중에 어학선생은 서서방, 고서방 그리고 그의 동생 안서방이었고, 하인으로는 용규, 세기, 인수 그리고 .. 더보기 스크랜튼과 전덕기 정동을 거점으로 하여 서대문, 남대문 지역으로 선교 영역을 넓힘으로 서울지역 선교 확산에 기여한 스크랜튼 가족은 1891년 3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2년 5월 돌아왔다. 서울에 귀환한 스크랜튼은 정동에 있던 시병원을 남대문시약소가 있는 남대문 안 상동 언덕으로 옮기기로 하였고 병원이외에 사는 집도 상동으로 옮겼다. 외국인들이 살기에 안전한 정동을 포기하면서 거주하기에 불편하고 위험한 상동으로 병원을 옮기려는 스크랜튼을 이해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민중이 있는곳으로 병원을 옮긴다는 것이 스크랜튼의 취지였으며 여기서 스크랜튼의 강한 인간애를 엿볼수가 있다. 그리하여 스크랜튼은 궁궐과 외국 공사관, 양반 저택들이 즐비하여 살기에 안전하고 편리한 ‘귀족 거주지’(royal place)를 .. 더보기 정동시병원-스크랜튼 스크랜튼은 1885년 5월 3일 인천에 도착하게 된다. 서울로 들어온 스크랜튼은 재동에 있던 알렌의 병원, 제중원에서 진료 활동을 시작했다. 스크랜튼은 한국말을 배우면서 자신과 일본에 있는 아펜젤러 가족이 들어와 살 집과 선교 부지를 구했다. 그는 미국 공사 주선으로 6월 중순 공사관 길 건너편에 한옥 기와집을 구입하여 이사한 후 9월부터 찾아오는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래쪽에 기와집 한 채를 더 구입하여 내부를 수리한 후 1886년 6월부터 대문에 ‘미국인 의사병원’이란 간판과 함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떤 병에 걸렸든지 매일 열 점 종에 빈 병을 가지고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란 안내판을 내걸고 환자들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스크랜튼의 병원이 자리를 잡아 갈 때 아펜젤러와 .. 더보기 열리는 선교의 문 갑신정변이후 국내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된 기미를 보이자 일본에 있던 선교사들은 입국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아펜젤러가 1진, 스크랜튼이 2진을 맡기도 하였는데 그에 따라 아펜젤러가 부인과 함께 1885년 3월 23일 요코하마를 출발, 고베(이곳에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합류했다)와 나가사키, 부산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에 인천에 도착하여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곧바로 서울에 들어가지 못했다. 인천 도착 직후 서울의 미국 공사나 인천항에 정박하고 있던 미군 함대 함장으로부터 “아직 서울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서양 여인의 등장이 한국 군중을 흥분시킬 수도 있다.”며 아펜젤러 부인의 서울행을 강력하게 만류하는 바람에 아펜젤러 부부는 닷새 만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반면 .. 더보기 이전 1 2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