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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알렌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영세한 호텔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알렌은 타월로 감싼 베개를 베고 당구대 위에서 밤잠을 겨우 잤다. 아침 요기는 숯불로 구운 닭고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8시에 조랑말을 타고 떠나 오후 5시에 한강변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서의 첫날밤을 청계천 언저리의 오막살이집에서 지냈다. 다음 날 알렌은 미국공사 푸트에게 인사하려고 미국공관을 찾아갔다. 신기하게도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웃고 손을 내밀며 놀라울 정도로 알렌을 반겨줬다. 당시 미국 군함 트렌톤 호가 민영익이 속한 보빙사 일행을 태우고 한국에 왔다는 소식이 장안에 자자했고, 서울에 머무는 해군 군인들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도처에 걸리는 등 장안이 축제 분.. 더보기
한국행을 결심한 ‘의사’ 알렌 경험이 일천한 26세 청년 의사로서는 이런 일들이 너무 힘들었다. 그때 중국 상하이에 머물던 미국인 의사 친구들이 “한국에 가보라”고 권유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는 외국인이 꽤 있으니 의사로 개업하면 생업으로 전망이 밝다는 그런 권유였다. 친구들은 “수입 면에서도 유리하다”는 권고를 숨기지 않았다. 그 당시 한국에는 조정에서 세관·외교·경제·산업·군사 등 여러 면에서 막강한 권세를 부리고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라는 사람이 있었다. 알렌의 친구는 그에게 소개장을 써줄 터이니 한국에 가보라고 권했다. 알렌은 ‘의사’라는 직함을 지닌 채 미지의 나라 한국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한국교회가 1909년 선교 25주년을 기념할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한국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축전.. 더보기
한국을 스쳐간 알렌 이전의 선교사들 알렌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를 계속하도록 처음 길을 튼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다. 그런데 그 이전에 우리나라를 스쳐간 서양 선교사들은 꽤 많았다. 가장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영국 웨일스의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있다. 1866년 초가을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했는데, 김일성의 할아버지가 칼을 들어 쳤다고 북한에서 떠드는 그런 사람이다. 토마스 목사가 자라고 그의 아버지가 목회하던 영국 웨일스 하노버 교회 담임을 한국인 유재연 목사가 맡았다는 국민일보의 최근 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네덜란드인 귀츨라프도 있었다. 1832년 여름 제주도를 거쳐 흑산도 앞바다까지 왔다가 제주도를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삼을 만하다고 장담하고 떠났던 사람이다. 그는 홍콩에 갔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는데, 홍콩은 그의 말대로 세.. 더보기
알렌의 거대한 역할 알렌은 한국에서 근대식 병원과 학교를 처음 시작했다. 또 조정과 가까워지면서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할 수 있도록 돕는 ‘입국통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한국에서 안련(安連)이라 불렸는데 묘하다. 선교사들 입국의 길을 ‘안전하게 연결시켜 주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조정과 아주 친근하게 지내게 되고, 고종을 도와 한국이 국제사회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입국한 지 6년 만에 미국 외교관으로 신분을 바꾼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국가 신분을 잃어 공사직에서 해임되고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 끝까지 한국을 위해 근대화 사역과 반일 친한의 강경책을 밀고나가는 데 앞장선다. 알렌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 초창기부터 우리 곁을 지켰다. 우리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 더러는 동료.. 더보기
첫 서양선교사 알렌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그는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4년 9월 20일 인천에 도착했던 한국 최초의 서양선교사다.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그리고 1905년 6월 9일 그의 나이 47세 때 한국을 떠나 미국 토레도시에 살다가 1932년 12월 11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만 21년을 머문 셈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 가운데 황금기는 한국에서 보낸 21년이었다. 그 외 여생은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 역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과 외교 사역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세상에 왔다가 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미 관계의 시작 광화문 거리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나는 그 건너편에 알렌의 동상을 세울 수 있다는 .. 더보기
이화학당 이화학당이 전문학교로 변한것은 6대 아펜젤러 교장부터이다. 스크랜튼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된 이화학당은 이화여전으로 변한후 광복때까지 이어지게되며 광복이후에 대학교로 승격을 하게된다. 6대 아펜젤러와 갈등을 빚던 김활란은 총독부의 협조를 얻어 1939년에 제7대 교장에 취임을 하게되면서 제7대 교장이 되게된다. 1935년에는 장소를 신촌으로 이전하게된다. 1925년부터 1945년까지는 이화여전의 시기이다. 1935년에 신촌 캠퍼스로 이전을 하였고 1943년에 재단법인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 더보기
인물 윤치호 충청도 아산에서 병조판서 윤웅렬의 자식으로 태어난 윤치호는 16살 때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는데 이때문에 윤치호를 조선의 첫 일본 유학생으로 보기도 한다. 일본어와 영어 공부에 몰두한 윤치호는 자신이 따랐던 김옥균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사귀며 개화의 필요성을 느꼈고 일본에 대한 강한 선망을 가지기도 했다. 조선 500년 역사를 “허송 세월”이라고 한 문창극 후보자가 인용했다는 윤치호는 조선을 음침한 중국보다도 못한 ‘똥뒷간’으로 인식했던 윤치호다. 윤치호는 국제사회에서 조선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동화됐듯이 일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며 1885년 에는 상하이 중서서원에 유학했는데 이당시에 윤치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청인(중국.. 더보기
윤치호 일기 윤치호는 개화·자강운동을 주도했던 근대적 지식인이자, 일제시기 조선 기독교의 원로였다. 그리고 또 하나, 바로 일제 말 친일파의 '대부'이기도 했다. 는 이 같은 사상적 양면성을 지닌 윤치호의 영문일기를 한글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60여년에 걸친 그의 일기 전체를 번역한 것은 아니고 1916부터 1943년까지, 일제강점기 하의 일기만을 대상으로 했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공인으로서의 활동, 국내외 정세에 대한 견해와 전망 등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가 가진 일제의 조선 통치정책에 대한 판단,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 조선의 역사, 문화, 전통, 민족성에 대한 인식 등을 매우 진솔하게, 때로는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어 그의 일기를 통해 당시 친일 지식인의 사고를 구체적으로.. 더보기
윤치호와 미국유학 윤치호는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동부의 밴더빌트 대학에서 2년 동안 신학과 영어를 수학하고, 1891~1893년 에모리 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을 수학, 졸업한다. 한민족 5천년 역사상, 미국에서 처음 대학을 졸업한 사람 1호가 윤치호이다. (우리에겐 애국가를 작사한 사람으로 더 친숙하게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에서 5년 동안 공부하면서, 낮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밤에는 식당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말에는 농장에 가서 일을 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았는데, 5년 후에 보니, 그의 수중에 모인 돈은 모두 2백불이었다. 그 당시 돈으로 2백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돈이었다. 얼마나 큰돈인가 하면.. 그 돈이면, 당시 한양(서울)에서 일반 가옥을 10채 이상 살 수 있.. 더보기
민족운동가 전덕기 전덕기는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에 참여했고, 상동교회 목사로 활동하면서 상동청년회 및 상동청년학원을 통해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또 신민회 창립 핵심인사로 항일구국운동을 선도하기도 했다. 그는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부친 전한규, 모친 임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9세 되던 해 부모 모두를 여의고 숯장수인 삼촌집 양자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전덕기는 17세 되던 해 당시 정동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미국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을 통해 결정적인 삶의 전환기를 맞게 됐다. 스크랜턴은 1885년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해 시병원을 설립하고 민중 지향적 선교를 전개한 인물로서 선생은 그의 민중 지향적 목회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903년 전덕기는 상동교회 내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