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아산에서 병조판서 윤웅렬의 자식으로 태어난 윤치호는 16살 때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는데 이때문에 윤치호를 조선의 첫 일본 유학생으로 보기도 한다.
일본어와 영어 공부에 몰두한 윤치호는 자신이 따랐던 김옥균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사귀며 개화의 필요성을 느꼈고 일본에 대한 강한 선망을 가지기도 했다.
조선 500년 역사를 “허송 세월”이라고 한 문창극 후보자가 인용했다는 윤치호는 조선을 음침한 중국보다도 못한 ‘똥뒷간’으로 인식했던 윤치호다.
윤치호는 국제사회에서 조선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동화됐듯이 일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며 1885년 에는 상하이 중서서원에 유학했는데 이당시에 윤치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청인(중국인)의 집은 음침하기
짝이 없어 일본 사람의 정결하고 명랑한 집에 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똥뒷간 같은
집이야 어찌 청인의 2층집에 비하겠는가.”
1888년 말에 미국으로 건너간 윤치호는 밴더빌트 대학에서 신학과 영어를 공부한 뒤 에모리대에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했는데 당시에 기독교도가 된 윤치호는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더러운 중국에 비해서 일본을 “동방의 낙원”으로 비유했다.
윤치호는 나라가 망한 그 다음해인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조선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대거 잡아들인 ‘105인 사건’으로 3년 징역을 살았다.
1915년 3월14일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윤치호는 “우리 조선 민족은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상호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노력할 필요가 있다…앞으로는 일본의 여러 유신 신사들과 사귀면서 일선 민족의 행복을 위해 양 민족 동화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3·1운동 때 국민대표로 서명하라는 권유를 뿌리쳤고 독립운동가들을 “자신이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순진한 사람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저주받을 악마와 같은 존재”라고 혐오했으며, 임시정부 참가 요청도 거부했다.
그는 반대 이유로 파리 강화회의에서 조선 문제는 상정도 되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조선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들고, “약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을 ‘맹목’적이라 비판하고, 조선 민족의 실력 양성만이 해법이라고 얘기했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그의 친일 행각은 본격화했다.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창립식’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1940년 창씨개명(伊東致昊·이토 지코)을 했다.
흥아보국단·임전보국단을 조직했으며, 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돼 시국강연을 다니며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했는데 광복이 되기 직전에 제국의회 귀족원의 조선칙선위원이 됐고 내부대신과 경찰부원까지 맡았다.
광복 직후 김구와 이승만, 미 군정청에 ‘한 노인의 명상록’이란 이름으로 보낸 편지에서 윤치호는 “일본의 신민으로서 ‘조선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들에게 일본 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는 어떤 대안이 있었겠”느냐고 했다.
그는 또 친일파 단죄를 반대하면서 조선 민중의 무지를 질타하고, “‘해방’이란, 단지 연합군의 승리의 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온 것뿐”이라며 독립운동가들을 “허세와 자만에 찬 저 ‘애국자’들”이라며 비아냥댔다.
계몽주의와 다윈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속류 사회진화론자로, 강자가 약자를 가르치고 지배하는 ‘힘에 의한 정의’를 믿었던 윤치호는 대세 순응주의자로 볼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