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는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동부의 밴더빌트 대학에서 2년 동안 신학과 영어를 수학하고,
1891~1893년 에모리 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을 수학, 졸업한다.
한민족 5천년 역사상, 미국에서 처음 대학을 졸업한 사람 1호가 윤치호이다.
(우리에겐 애국가를 작사한 사람으로 더 친숙하게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에서 5년 동안 공부하면서,
낮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밤에는 식당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말에는 농장에 가서 일을 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았는데,
5년 후에 보니, 그의 수중에 모인 돈은 모두 2백불이었다.
그 당시 돈으로 2백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돈이었다.
얼마나 큰돈인가 하면..
그 돈이면, 당시 한양(서울)에서 일반 가옥을 10채 이상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에모리 대학에서 졸업식을 하는 날,
졸업생들은, 모두가 약 30초씩, 단상에서 연설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졸업생들은 앞에 나가서, 부모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교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고,
어떤 학생들은 미래의 자기 포부를 이야기하고 그랬다.
윤치호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젊은이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 젊은이입니다. (29세)
저는 공부하면서 틈틈이 일을 해서 2백불을 모았습니다.
저는 이 돈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부디 내 나라의 선교를 위해서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졸업식 날, 그는 모았던 돈을 모두, 한국의 선교헌금으로 드렸다.
당시 에모리 대학의 총장은 아서 켄들러 박사였다.
켄들러 박사의 형은, 코카콜라 회사를 세운 창업자였다.
그래서 에모리 대학(아틀란타 소재) 켄들러 총장은,
코카콜라 (아틀란타 소재) 회사 사장인 자기 형을 찾아가서,
윤치호에 대해 여차여차 이야기했다.
그래서 코카콜라 사장으로부터, 윤치호의 헌금에 10배나 되는 돈을 더 모금한다.
그 모금액은,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미국 남감리교 선교헌금으로 사용되어졌다.
▶1893년 가을 윤치호는 미국 에모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한편 그에게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미국 남감리교회의 제안이 들어왔으나
그는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1895년, 그는 배편으로 귀국한다.
당시에는 고종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고종은 개화파 지식인들과 정치를 같이 하기로 마음을 결정했다.
당시 조선에는, 윤치호보다 더 뛰어난 지식인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일본, 중국, 미국 등 3개국에서 공부를 했다.
윤치호는 귀국하자마자 31세의 나이로, 군수로 임명되었다.
그가 군수를 했던 지역에서, 그는 자기 집에서부터 교회를 세웠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유교사당을 헐어버리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그의 고향 아산 둔포에 가면, 둔포 교회가 있다. 그가 세운 교회이다.
그의 벼슬이 높아졌다. 오늘날로 치면 외무부 차관까지 오른다. (김홍집 내각에서 외무부 협판)
그는 대신(장관)은 되지 못했다.
한일합병이 되어서, 일제가 윤치호에게 외무대신 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독립투쟁(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6년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윤치호 장로(정동감리교회)는, 일제 말기에, 친일행적을 했다는 이유로
해방 후에 친일파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관점과 시야가 넓어서 조선과 일본과 협력하여 했을 수도 있다.
그의 조카가 윤보선 전직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