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격동의 시기에 가난하고 억눌린 민초들을 위해 살았던 신앙인.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 되던 1900년대에 민족운동의 기치를 든 목회자. 바로 전덕기 목사이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를 담임하면서 민족구국운동의 산실로 자리매김한 상동청년회를 조직하고 이끈 인물이다. 전덕기 목사는 1914년 3월 23일 향년 38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올해로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년을 맞았다.
상동교회 광복회 등은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기를 맞아 ‘전덕기, 왜 전덕기인가?’라는 주제로 3월 13일 충무아트홀에서 추모식 및 학술대회를 가졌다. 학술대회는 이덕주(감신대) 윤경로(한성대) 한규무(광주대) 교수가 나서 전덕기 목사의 신학사상과 구국애국정신, 민족계몽운동에 대해 발표를 했다.
사랑을 실천한 전덕기 목사
전덕기 목사는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로부터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될 정도로 구한말 구국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전 목사의 핵심 정체성은 목회자였다.
전덕기 목사는 1875년 12월 8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가 9살이 되던 1884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는 고통을 겪었다. 숯장수를 하던 가난한 삼촌집에 양자로 들어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다. 전덕기 목사의 삶에 결정적인 사건은 스크랜턴 선교사를 만난 것이다. 스트랜턴 선교사가 운영하던 병원에서 일하게 된 전덕기 목사는 1896년 세례를 받고, 1902년 전도사가 되어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전 목사는 사회의 낮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함께 근대 사회사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애휼회를 설립해 빈민구제에 나서고, 병으로 죽어서 누구도 돌아보지 않은 시신을 장례치러 주고, 공옥남녀학교와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해 교육에 나서는 등 전방위 사역을 펼쳤다. 이런 사역으로 전덕기 목사가 담임하던 상동교회는 3000명이 출석하는 한국 최대 교회가 됐다.
구국운동에 앞장선 전덕기 목사
전덕기 목사의 목양과 사역은 당시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킬만 하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오늘, 국가와 사회기관에서도 전 목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고 동참했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윤경로 교수는 ‘전덕기 목사의 구국운동과 애국정신’이란 주제로, 민족구국운동을 선도한 전 목사의 면모를 고찰했다.
윤경로 교수는 “전덕기 목사는 1896년 독립협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한 이래 공옥학교 엡윗청년회 상동청년회 상동청년학원을 견인하는 등 구국계몽기 민족운동을 선도한 인물”이라며, “국내 최초의 구국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 결성과 헤이그밀사파견 및 105인사건 등에 깊에 연루된 구국운동의 선구자”라고 밝혔다.
전덕기 목사가 상동교회에서 조직한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은 독립협회 해산으로 흩어졌던 개혁적인 인사들을 재규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동청년회는 성경공부와 토론회 전도운동을 표면에 내세웠지만, 청년에게 애국심과 구국정신을 고취하는 목적을 갖고 있던 강력한 구국단체였다는 것이다. 또한 상동청년회는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하며, 당시 회원이 1400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상동청년회는 이런 물적 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1905년 을사조약반대투쟁을 비롯해 일제의 군용지 매수반대운동, 부패한 구한말 관료 및 일진회 대항운동 등 반일구국운동을 펼치며 ‘상동파’라고 지칭됐다.
이후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상동파는 1900년대 대표적인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설립하는데 모체가 됐다. 신민회는 이동휘 안창호 이준 이상설 지석영 이만수 이승훈 양기탁 등 당대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했고, 이곳에서 이상설 이준 열사의 헤이그밀사파견까지 추진됐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가 와해되고 애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할 때, 전덕기 목사는 실의와 좌절에 빠지고 폐결핵으로 몸이 약해지면서도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다”며, “병상에서도 신민회 재구축과 신흥무관학교 등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