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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기독교민족운동

상동교회 전덕기 서울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던 전덕기 목사. 기독교 신앙과 구국운동을 하나로 묶어 한말 민족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일진회를 앞세워 '보호조약' 체결 공작을 벌이자 서울시내에서 대대적인 반대 운동이 열렸다. 구국기도회와 '도끼 상소'(상소를 들어주지 않으려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뜻), 가두시위로 이어지는 을사조약 반대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상동청년회 회장이었던 전덕기 목사였다. 우리나라의 두 번째 감리교회인 서울 상동교회(1888년 설립)를 기반으로 한말(韓末)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전덕기(全德基·1875~ 1914) 목사의 기념사업이 시작됐다. 4일 서울 중구 남창동 상동교회(담임목사 서철)에서 발족한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년 추모사업회'는 .. 더보기
인물 윤치호 충청도 아산에서 병조판서 윤웅렬의 자식으로 태어난 윤치호는 16살 때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는데 이때문에 윤치호를 조선의 첫 일본 유학생으로 보기도 한다. 일본어와 영어 공부에 몰두한 윤치호는 자신이 따랐던 김옥균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사귀며 개화의 필요성을 느꼈고 일본에 대한 강한 선망을 가지기도 했다. 조선 500년 역사를 “허송 세월”이라고 한 문창극 후보자가 인용했다는 윤치호는 조선을 음침한 중국보다도 못한 ‘똥뒷간’으로 인식했던 윤치호다. 윤치호는 국제사회에서 조선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동화됐듯이 일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며 1885년 에는 상하이 중서서원에 유학했는데 이당시에 윤치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청인(중국.. 더보기
윤치호 일기 윤치호는 개화·자강운동을 주도했던 근대적 지식인이자, 일제시기 조선 기독교의 원로였다. 그리고 또 하나, 바로 일제 말 친일파의 '대부'이기도 했다. 는 이 같은 사상적 양면성을 지닌 윤치호의 영문일기를 한글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60여년에 걸친 그의 일기 전체를 번역한 것은 아니고 1916부터 1943년까지, 일제강점기 하의 일기만을 대상으로 했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공인으로서의 활동, 국내외 정세에 대한 견해와 전망 등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가 가진 일제의 조선 통치정책에 대한 판단,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 조선의 역사, 문화, 전통, 민족성에 대한 인식 등을 매우 진솔하게, 때로는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어 그의 일기를 통해 당시 친일 지식인의 사고를 구체적으로.. 더보기
윤치호와 미국유학 윤치호는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동부의 밴더빌트 대학에서 2년 동안 신학과 영어를 수학하고, 1891~1893년 에모리 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을 수학, 졸업한다. 한민족 5천년 역사상, 미국에서 처음 대학을 졸업한 사람 1호가 윤치호이다. (우리에겐 애국가를 작사한 사람으로 더 친숙하게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에서 5년 동안 공부하면서, 낮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밤에는 식당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말에는 농장에 가서 일을 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았는데, 5년 후에 보니, 그의 수중에 모인 돈은 모두 2백불이었다. 그 당시 돈으로 2백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돈이었다. 얼마나 큰돈인가 하면.. 그 돈이면, 당시 한양(서울)에서 일반 가옥을 10채 이상 살 수 있.. 더보기
민족운동가 전덕기 전덕기는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에 참여했고, 상동교회 목사로 활동하면서 상동청년회 및 상동청년학원을 통해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또 신민회 창립 핵심인사로 항일구국운동을 선도하기도 했다. 그는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부친 전한규, 모친 임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9세 되던 해 부모 모두를 여의고 숯장수인 삼촌집 양자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전덕기는 17세 되던 해 당시 정동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미국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을 통해 결정적인 삶의 전환기를 맞게 됐다. 스크랜턴은 1885년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해 시병원을 설립하고 민중 지향적 선교를 전개한 인물로서 선생은 그의 민중 지향적 목회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903년 전덕기는 상동교회 내에.. 더보기
전덕기와 상동파 구한말 격동의 시기에 가난하고 억눌린 민초들을 위해 살았던 신앙인.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 되던 1900년대에 민족운동의 기치를 든 목회자. 바로 전덕기 목사이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를 담임하면서 민족구국운동의 산실로 자리매김한 상동청년회를 조직하고 이끈 인물이다. 전덕기 목사는 1914년 3월 23일 향년 38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올해로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년을 맞았다. 상동교회 광복회 등은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기를 맞아 ‘전덕기, 왜 전덕기인가?’라는 주제로 3월 13일 충무아트홀에서 추모식 및 학술대회를 가졌다. 학술대회는 이덕주(감신대) 윤경로(한성대) 한규무(광주대) 교수가 나서 전덕기 목사의 신학사상과 구국애국정신, 민족계몽운동에 대해 발표를 했다. 사랑을 실천한 전덕기 .. 더보기
전덕기 목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 짧은 생을 마감한 고 전덕기 목사가 정부 기관인 국가보훈처에 의해 ‘2014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면서, 그가 소속했던 교회와 교단을 중심으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상동교회는 서거100주기가 되는 내년, 사업을 전개해 고인이 남긴 ‘포용의 정신’을 한국교회와 사회에 공유함으로써 통합과 기독교의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밝혔다. ▲상동교회 고 전덕기 목사. 성문 밖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로 불린 전덕기 목사, 상동교회(서철 목사)가 2일 서울 을지로 한 음식점에서 ‘전덕기 목사 서거100주기 추모사업’관련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상동교회는 고인이 담임으로 시무했던 교회로, 일제강점기 주시경 선생과 함께 청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재야의 인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