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던 전덕기 목사.
기독교 신앙과
구국운동을 하나로 묶어
한말 민족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일진회를 앞세워 '보호조약' 체결 공작을 벌이자 서울시내에서 대대적인 반대 운동이 열렸다. 구국기도회와 '도끼 상소'(상소를 들어주지 않으려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뜻), 가두시위로 이어지는 을사조약 반대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상동청년회 회장이었던 전덕기 목사였다.
우리나라의 두 번째 감리교회인 서울 상동교회(1888년 설립)를 기반으로 한말(韓末)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전덕기(全德基·1875~ 1914) 목사의 기념사업이 시작됐다. 4일 서울 중구 남창동 상동교회(담임목사 서철)에서 발족한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년 추모사업회'는 일제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던 시기에 기독교 신앙과 민족운동을 일치시켰던 전덕기 목사를 기리는 사업을 펼친다. 추모사업회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전용재 감독, 장동일 협성대 총장, 장명수 이화학당 이사장,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 이종찬 전 국정원장 등 각계 인사 150여 명으로 구성됐다.
남대문 시장의 숯장수 아들이었던 전덕기는 미국 감리교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의 감화를 받아 1896년 그가 세운 상동교회의 교인이 됐다.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스크랜턴을 돕던 그는 1902년 전도사가 되면서 상동교회 운영을 맡았으며, 1905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07년에 담임목사가 됐다.
전덕기 목사 시대의 상동교회는 '민족운동의 요람'이었다.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은 민족운동가를 길러냈고, 헤이그 밀사 파견과 민족운동 비밀결사인 신민회 결성이 상동교회에서 이루어졌다. 그와 함께 상동교회에서 활동하던 이준·주시경·이회영·이동녕·김구·이승만 등은 '상동파(尙洞派)'로 불리며 민족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전덕기 목사는 1912년 신민회 조직이 드러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일제의 모진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상동교회에 뿌린 민족운동의 씨앗은 깊이 뿌리를 내렸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상동교회 출신이 4명(최석모·오화영·이필주·신석구)이나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