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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근대교회사

후스

후스는 웅변과 학식으로 유명했지만 그의 학 설은 대부분 위클리프로부터 배웠던 것이며, 그 자신의 독창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저술에는 위클리프 의 문장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 적지 않다. 오직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그가 위클리프 의 화체설(化體說)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은 정도였다.

그러나 후스의 로마교회 비판은 독일인과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보헤미아의 정치적 사정에 편승해 체코인의 열렬한 지지 를 얻었다. 그는 1415년 콘스탄츠 종교회의에 소환되어,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일신의 안 전을 보장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이단이라 하여 화형에 처해졌다.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로마교회는 이미 땅속에 파묻힌 위클리프에게 새삼 사형 선고를 내리고,그 유해를 파내어 화형에 처 하고 재를 스위프트강에 던져 넣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후 체코인은 일제히 봉기하여 신성 로마 황제와 로마교회를 상대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항쟁했다.

더구나,후스파를 완전히 진압할 수 없었던 로마교회는,그들의 주장을 일부 인정하고 타 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로마교회에서는 미사 때 일반신자에게 성체로서 빵만 나누어 주고,포도주는 사제만 마시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후스파는 일반신자에게도 포도주를 나 누어주기를 요구하였다.

이것은 형식상의 사소한 일처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실상은 더욱 본질적인 문제와 관련 되어 있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 전의 최후의 만찬 때 “이는 내 몸이요,내 피 니라” 하고 빵과 포도주를 12사도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일반신자에게는 왜 양쪽다 주지 않는가. 승려도 속인도 신 앞에서는 구별이 없을 터인데 말이다. 두 종류의 성찬이라 불 리는 빵과 포도주 양쪽의 영성체를 주장하는것은 '신 앞에서의 만인의 평둥'이라는 생각올 그 밑바닥에 깔고 있었다고 하겠다.

후에 루터가 내세운 많은 주장은 이미 위클 리프나 후스의 주장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올 종교개혁의 선구 자라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으로 인해서만 사람은 의롭다 할 .것이다'라는,루터의 개혁사상의 핵심이라 고도 할 위치를 차지하는 이 이념이 그들 선 구자에게는 없었다. 이 사실도 또한 명기되어 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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