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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근대교회사

평양 첫 번째 교회인 ‘널다리골교회’ 모펫 목사가 노방전도를 하다가 후에 회개하고 유명한 목사가 된 이기풍의 돌팔매에 맞아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조선초기선교사상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그는 1893년 평양에 첫 번째 교회인 ‘널다리골교회’를 세웠다. 후에 ‘장대현교회’로 개칭되어 해방후 북한이 강제로 폐쇄할 때까지 서북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그는 특히 조선인 조사들을 앞세워 평북지역에는 김관근, 평남지역에는 한석진, 황해도 지역에는 서상륜을 대표자로 임명하고 ‘팀웍’선교를 시행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제자들을 키웠다. 이 지역에 그가 직, 간접으로 세운 교회들이 수없이 많았다. 널다리골 교회 --- 장대현 교회의 모태 무엇보다도 모펫의 가장 큰 업적은 지도자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 교육에 힘 쓴 것이다. 더보기
한미 관계와 기독교 한·미 관계의 시작 광화문 거리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나는 그 건너편에 알렌의 동상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변함없이 갖고 있다. 알렌의 공헌이 근대 한국사에서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로 근대 한국의 역사를 연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수교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882년 5월 한미수호조약이 효시다. 미국과는 조약이 있기 16년 전부터 여러 차례 교섭이 있었다.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했을 때 불에 탄 상선이 미국 선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가장 먼저 수교할 수 있었던 데는 이 같은 여러 차례의 만남이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수호조약이 있던 해에 한불조약, 한영조약, 한독조약 등이 잇따라 맺어지면서 한국은 세계의 일원으로 첫발을.. 더보기
신비주의와 종교개혁 신비주의가 종교개혁에 적잖은 영향 을 가지고 있다는 것울 전하는 사실이다.신비주의의 또 하나의 중심은 네덜란드였 다. 그곳에서 신비주의가 나타난 것은 독일보다 늦지만,독일의 신비주의자가 일반적으로 사 색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 었던 데 비해,네덜란드의 신비주의자는 보다 실천적이어서 교육활동에도 힘을 기울였으므 로 그들이 미친 감화와 영향은 더욱더 광범위 했다.그중에서도 특히 언급되어야 할 것은 프로 테의 활동과《예수를 본받아서)다. 프로테는 민중 속에 들어가 설교활동을 하면서 내면적 인 신앙과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을 권했다. 거기에서 '새로운 경건'이라 불리는 종교운동 이 일어나 '공동생활 형제단'이라는 종교단체 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북독일.프랑스‘덴마크에도 영향올.. 더보기
후스 후스는 웅변과 학식으로 유명했지만 그의 학 설은 대부분 위클리프로부터 배웠던 것이며, 그 자신의 독창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저술에는 위클리프 의 문장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 적지 않다. 오직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그가 위클리프 의 화체설(化體說)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은 정도였다. 그러나 후스의 로마교회 비판은 독일인과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보헤미아의 정치적 사정에 편승해 체코인의 열렬한 지지 를 얻었다. 그는 1415년 콘스탄츠 종교회의에 소환되어,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일신의 안 전을 보장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이단이라 하여 화형에 처해졌다.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로마교회는 이미 땅속에 파묻힌 위클리프에게 새삼 사형 선고를 내리고,그 유해를 .. 더보기
칼뱅의 생애 1509 출생 1521-1526? 파리대학:문학사와 문학석사학위 1526-1531 오르린 대학: B.A.와 변호사 자격 취득 1529-1530 Bourges대학: 개신교로 개종 1535 프랑스에서 추방, 바젤에 정착 1536 첫판 출판, 제네바에 정착 1538-1541 제네바에서 추방,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목회 1540 Idelette de Bure와 결혼 1541 제네바로 돌아옴 1542 교회의 조례제정 1549 Idelette 사망 1553 세르베투스 처형 1555 Libertine반대자들이 드디어 제네바를 떠남 1559 마지막판 출판, 제네바 대학 개교 1564 사망(55세) ​ 제임스 패커에 의한 칼빈의 생애와 사상 ​ 칼빈이 역사에 남긴 인상은 거대한 손에 사로잡힌 하나의 뜨거운 심장을 보여준다... 더보기
서상륜 형제 서상륜은 호탕한 에서와 같은 성품을 가졌고, 서경조는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성격의 전형적인 선비형의 인물이다. 서상륜이 1879년 세례를 받고 로스와 성경 번역에 열중할 때, 동생인 서경조는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이들 형제는 잠시 동안 다른길을 걷게된다. 서경조는 처음에는 신앙의 뿌리를 쉽게 내리지 못하여 형과 헤어졌지만 후에는 한국 교회에 절대로 필요한 인물로 성장한다 더보기
복음의 씨앗 한국 최초의 교회는 황해도의 소래교회이다. 이후 소래교회의 여세를 몰아 서울에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가 세워지고 이후 이전하면서 새문안교회로 이름을 고치게된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정동교회와 정동감리교회가 조금 혼돈이 되기도 하는데.. 이후 지방의 경우 대구경북 최초의 교회는 대구제일교회이다. 한국의 몽마르뜨 언덕이라고하는 청라언덕 주변에 대구 경북최초의 교회 제일교회가 생겼고 지금은 대구시에서 '근대로의 여행'이라는 골목길 테마지역으로 활용이 되고 있다. 서울의 양화진 선교사 묘역보다는 훨씬 조촐하지만 청라언덕 주변에 경북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들의 묘역이 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