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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근대교회사

한미 관계와 기독교

한·미 관계의 시작

광화문 거리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나는 그 건너편에 알렌의 동상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변함없이 갖고 있다. 알렌의 공헌이 근대 한국사에서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로 근대 한국의 역사를 연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수교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882년 5월 한미수호조약이 효시다.

미국과는 조약이 있기 16년 전부터 여러 차례 교섭이 있었다.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했을 때 불에 탄 상선이 미국 선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가장 먼저 수교할 수 있었던 데는 이 같은 여러 차례의 만남이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수호조약이 있던 해에 한불조약, 한영조약, 한독조약 등이 잇따라 맺어지면서 한국은 세계의 일원으로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 앞서 일본과는 6년 전인 1876년 2월에 굴욕적인 수교조약을 맺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해에 임오군란이 터졌다. 일본공사관을 한국군이 습격하고 일본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은 민비가 변장을 하고 충주로 피난을 가는 난리가 일어나 앞이 캄캄하던 때였다.

 

얼마 후 일본은 우리 조정을 위협, 제물포조약을 통해 배상금 등으로 당시로선 거액인 55만원을 보상받았다. 실로 국가의 운명이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때였다.

미국의 북경공관과 서울공사관이 ‘동격’

그런데 미국은 우리 한국에 꿈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1883년 정월 한미수호조약이 비준되자

 

 첫 주한공사로 푸트를 임명했다.

 

 그런데 그 주한공사관의 위격이 북경의 미국공사관 위격과 같았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처럼 보이던 청나라 북경이 미국에서는 한국 서울과 동격으로 취급된 것이다. 이것은 천지개벽과 같은 변이었다.

 

‘청국과 한국이 같다!’ 이것을 1883년 정월에 미국이 해낸 것이다. 그렇게 인정해 준 것이 미국이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서 파견한 보빙사

 

민영익 일행이 귀국할 때에 미국 해군의 거대군함

 

 트렌턴호에 태워 인천까지 보내주었다.

 

 

 

미국정부가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에 대해서 보였던 이런 태도는 역사적으로 묘하게 계속된다. 전통이 된다. 우리는 그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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