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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근대교회사

칼뱅의 생애

1509 출생

1521-1526? 파리대학:문학사와 문학석사학위

1526-1531 오르린 대학: B.A.와 변호사 자격 취득

1529-1530 Bourges대학: 개신교로 개종

1535 프랑스에서 추방, 바젤에 정착

1536 <기독교 강요> 첫판 출판, 제네바에 정착

1538-1541 제네바에서 추방,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목회

1540 Idelette de Bure와 결혼

1541 제네바로 돌아옴

1542 교회의 조례제정

1549 Idelette 사망

1553 세르베투스 처형

1555 Libertine반대자들이 드디어 제네바를 떠남

1559 <기독교 강요> 마지막판 출판, 제네바 대학 개교

1564 사망(55세)

제임스 패커에 의한 칼빈의 생애와 사상

칼빈이 역사에 남긴 인상은 거대한 손에 사로잡힌 하나의 뜨거운 심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최선의 준비와 최선의 신실함(Prompte et sincere in opere Dei)으로라는 표어가 새겨져 있다. 칼빈은 당대와 적어도 그후 100년 동안에 살았던 어느 누구보다도 그의 사상이 역사를 더 풍요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실, 16세기 중엽부터 다음 세기 말엽까지 칼빈의 시대였다.

칼빈 없이는 순수한 개신교는 17세기 중엽을 넘어 생존하여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필요할 경우, 최후의 순간까지 로마 카톨릭의 압제자들과 국가만능론자들에 대항하여 굳건히 서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개신교도들은 칼빈주의자들이다는 사실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이성의 시대가 열리기 전의

 

모든 위대한 대결에서 당위성을 설정하고 지배한 것은 칼빈주의이다. 18세기 부흥운동과 함께 시작되어 19세기에 사회, 정치, 선교, 그리고 교회 구조적 표현으로 확대하여 나간 복음주의 운동이 존 칼빈이 없었다면 그처럼 일어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지도자 모두는 자신들의 기본적인 신앙에 있어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칼빈은 불꽃 튀고 뚫어지게 응시하는 커다란 갈색의 눈에다, 가냘프고, 예리한, 흑발의 멀쑥한 불란서 사람이었다. 편두통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소식(하루에 한끼)을 했다. 나이가 들고 건강이 약해지면서, 칼빈은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몹시 수척했으며, 게다가 바싹 말랐다. 칼빈은 결코 신체적으로 강건하지 않았다. 30세까지 그의 건강은 다 망가지고 말았다. 자신의 임종이 가까워 오던 몇 년 동안 칼빈은 만성천식과 폐결핵, 게다가 소화불량, 두통, 담석, 치질, 통풍, 그리고 열병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존 칼빈은 최후까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과 인간들을 섬겼다.

 

그는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다.​ 심지어 아플 때에도 자신의 불어와 라틴어를 받아적도록 4명의 비서들을 유지하였다. 방대한 그의 저술은 그런 그의 노력에 의해서 산출된 것이며, 결코 기적과는 거리가 멀다. 매일의 설교와 강연, 성경주석의 집필, 끊임없이 쏟아지는 신학논문들, 방대한 서신, 장로법원에서의 업무, 그리고 끝없는 방문객의 환대---.

 

칼빈은 악의적이지도 병적이지도 않았다. 책과 아름다움을 사랑하듯이, 칼빈은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쉽게 성내고 흥분하는 예민한 성격 때문에, 칼빈은 신학논쟁과 설교에서 만큼이나 우정에서도 확끈하고 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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