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진리를 전할 시간을 채 갖지 못했다.”고 베어드가 남긴 기록으로 보아 이번 경상도 전도여행은 본격적인 전도를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곧 다가올 미래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탐색 여행의 성격이 진하다.
일행은 일정보다 다소 늦게 밀양을 떠나 21일 오후 청도 삼거리에 도착했다.
밀양에서 청도까지 쉬지 않고 걸어온 베어드 일행은 청도 읍내의 널찍한 바위에서 잠시 쉬어간다.
바위 옆,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는 맑은 물이 감도는 깊은 소(沼)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수백 년은 됨직한 노거수와 샘까지 있어 주님의 종들이 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베어드 선교사가 택한 복음 여행길은 과거 선비들이 부산에서 밀양 청도 대구 문경새재 충청도를 거쳐 한양(서울)으로 다니던 '과거길'이자 조정에 공물을 운반하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베어드 일행이 머문 청도의 명물 납딱바위는 한때 경부선 철로를 내느라 대부분 땅에 파묻혀버려 일부만 남아있었다.
지난 98년 김상순 청도군수가 청도 역전 도로를 확장하면서 납딱바위의 건강한 몸체를 더 드러내고 주위에 향토수종을 심어 옛맛을 일부 살려냈다.
하지만 과거를 앞두고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의 답답한 가슴을 식혀주고, 목마른 나그네들에게 한줄기 생명수를 주던 납딱바위 옆 찬물샘은 묻혀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차들이 쌩쌩 달려가는 대로변을 약간 벗어난 청도 번화가에 자리잡고 있는 납딱바위는 오래도록 살아남아 ‘예정된 미래’를 준비했던 선교사들의 복음 여행의 현장이었음을 온몸으로 말하여 주리라.
팔조령(八助嶺) 도적떼를 피해, 숲길에 우거진 가시덤불에 가슴을 찔리는 강행군 일주일 만에 베어드 일행은 대구 남문에 도착했다. 1893년 4월 22일 오후 1시, 대구에 개신교가 전래된 ‘영원의 시간’이다. 이후에도 베어드는 경상도 전도여행을 몇 차례 계속했다. 첫 방문 이듬해인 1984년 4월과 5월에 대구를 2차, 3차 방문한 베어드는 대구에 선교지회 설치를 청원하여 1895년 11월에 승인을 받아냈다.
남문 안 정완식의 땅(420평)과 집들을 구입하고, 아내 애니와 아들(존)을 데리고 이사를 왔으나 서울로 발령이 나고, 1986년 11월 손아래 처남인 애담스(Rev. James E. Adams·안의와) 목사에게 인계됐다.
1897년 대구에 부임한 안의와 선교사는 1923년까지 수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대구 제일교회를 설립하고 반야월교회 사월교회 등을 세웠으며 대구 초등학교의 시초인 대남소학교(희도학교 전신·1900년)와 계성학교(1906년) 등을 세웠으며 계명대학교도 설립했다.
1897년 11월 1일 대구에 도착, 지체하지 않고 예배를 드린 애담스 목사는 대구를 서울 평양에 이은 3대 선교 거점으로 육성시킨 주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