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9월 20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영세한 호텔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알렌은 타월로 감싼 베개를 베고 당구대 위에서 밤잠을 겨우 잤다. 아침 요기는 숯불로 구운 닭고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8시에 조랑말을 타고 떠나 오후 5시에 한강변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서의 첫날밤을 청계천 언저리의 오막살이집에서 지냈다.
다음 날 알렌은 미국공사 푸트에게 인사하려고 미국공관을 찾아갔다. 신기하게도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웃고 손을 내밀며 놀라울 정도로 알렌을 반겨줬다. 당시 미국 군함 트렌톤 호가 민영익이 속한 보빙사 일행을 태우고 한국에 왔다는 소식이 장안에 자자했고, 서울에 머무는 해군 군인들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도처에 걸리는 등 장안이 축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알렌은 미국공사관에서 뜻밖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중국에서 몇 번이고 죽을 뻔한 일을 겪었던 알렌으로서는 천당에 온 것 같았다. 그의 인생은 새로운 여명으로 빛나고 있었다. 미국공사 푸트는 나이가 많아 병약했고, 그의 부인 역시 심하게 병을 앓아 밤낮 누워 있었다. 뜻밖에 본국인 의사를 만나게 된 공사 부부는 그야말로 구세주를 만난 듯 알렌을 반겼다.
고종도 알렌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종은 푸트에게 사람을 보내 혹시 그가 선교사가 아닌지 물었다고 한다. 푸트는 당연히 선교사가 아니고 ‘의사’라고 답했다. 이후 알렌은 미국공사관뿐만 아니라 서양 여러 나라 공사관, 심지어 일본공사관의 공의(公醫)라는 직함을 갖고 한국 활동을 시작한다. 알렌은 이제 살 것 같았다.
한국선교의 시작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한 1885년 4월로 보느냐, 알렌이 들어온 날짜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오래도록 결론나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다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 원인 중 하나는 알렌이 의사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선교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함께 들어온 서양문명
알렌의 입국이 근대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과언이 아니다. 한국과 기독교의 관계는 물론 한·미와 한·일 관계의 중심에 항상 그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근대 한국의 국제적 거점이었다. 알렌이 입국할 때에 서울에는 외국인들이 꽤 많았다. 각 외국공관에 그 나라 군인들도 많이 상주하고 있었다. 뫼렌돌프라고 하는 독일인은 현재로 치면 외교통상부의 차관급으로 상당한 권세까지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역사에 남긴 흔적은 미미하다.
알렌이 다시 중국에 가서 아내와 가구들을 챙겨서 오려고 떠나던 그해 10월 11일, 함께 연락선에 탄 서양 사람들이 있었다. 실업가 두 사람, 교수 한 사람, 그리고 창녀 한 사람이었다. 서양의 문명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이었다. 서양의 비즈니스, 서양의 교육문화, 서양의 퇴폐문화 그리고 기독교를 대변하는 인물들이 탄 것이다. 그런데 비즈니스와 교육, 그리고 퇴폐문화는 한국을 떠나고 있었다. 반면 알렌은 한국에 자리를 굳게 잡고, 정착하기 위해 더 많은 것들을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한국 근대화에서 만일 기독교가 이처럼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복음을 접하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일본이나 중국처럼 됐을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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