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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선교역사

최초의 선교사들

감리교회로 전향한 아펜셀러가 처음으로 언더우드를 만난 것은 커넷티컷에서 열린 “신학교연합회”에서 였다.

 

그는 이 학회에서 눈에 띄게 활약하는 총명한 청년 언더우드를 잊을 길이 없었고, 그후 그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을 때까지 선교의 동역자로 운명을 같이 하였다. 아펜셀러는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벽안의 땅에 와서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헌신한 위대한 선교사였다.

미국의 남장로교회가 선교사를 한국에 계속해서 파송하기로 한 것은 언더우드선교사가 네쉬빌에서 열린 신학교 협의회에서 행한 열정적인 설교와 선교보고를 들은 교단의 외국선교부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선교부의 실행위원회는 1891년 12월 세 명의 청년의 한국행을 승인하고, 4명의 여자도 함께 한국으로 나갈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1892년에 알렌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에 들어왔다.

이들은 서울에 들어와서 사무엘 마펫(한국명;마포삼열)선교사의 영접을 받은 날로부터 곧장 1년 계획으로 한국어를 공부하였으나 언어의 장벽은 심각하여 선교현장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은 특히 전라도 지역의 선교를 위해서 집중적으로 헌신하였다.

국내에서 이루어진 선교사역의 대부분은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인으로서 선교사역에 헌신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감리교인 윤치호였다. 그는 한때 학부 협판으로 활약하였고, 1896년 충정공과 함께 러시아황제 니콜라이의 대관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갑신정변 때 김옥균과의 친분 때문에 친일로 몰려 할 수 없이 일본으로 도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으로 상해에 동행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남감리교 계통의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1887년 4월 3일 한국인 최초로 남감리교인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후 그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밴드빌트 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각각 신학과 영문학을 전공하여 한국인으로서는 당시에 가장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 후 윤치호는 에모리 대학의 총장에게 200여 달러를 보내면서 한국 선교를 간청하였고, 이것이 결실을 얻게 되면서 북경에 주재하던 리드목사가 입경하여 윤치호와 함께 사역으로 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세례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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