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발을 들여 놓았던 프로테스탄트교인은 네덜란드인 벨트브레(박연)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귀화하여 오래 사는 동안에 선교에 관한 것에는 관심조차도 두지 않았다.
그후 같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저 유명한 하멜이 한국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장로교인으로서 한국의 종교 관해서 나름대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였으나, 실질적으로 기독교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1832년 7월 동인도 회사 소속의
암허스트호를 타고 황해연안을 답사하러 왔던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의 구츨라프 목사가 있다.
그는 이 땅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에게 성경을 주면서 “가난한 나라, 자연을 가꾸지 못한 이 나라가 복음과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부요해 지기를”기도하였다. 그는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답사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문성경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작정하신 날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힐 것이다”라고 믿고 이 나라를 떠나갔다.
서구형 선교사로서 우리 나라에 들렀던 선교사 가운데 로버트 토마스가 있다. 그는 병인교난이 충천하던 1886년 대동강가에서 칼을 들고 달려드는 병사에게 성서를 내주며 아깝게 세상을 떠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순교자이다. 영국 웨일즈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는 젊은 날 방황하기도 했으나, 철저한 신앙과 선교에 대한 사명감으로 다시 태어나 하노버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상해에 도착한 후 아내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지만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에서 온 동지사 일행으로부터 카톨릭 박해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후 토마스의 눈은 조선을 향하게 되었고, 마음은 한 시도 조선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리델신부로부터 조선에서의 카톨릭박해에 관한 소식을 들은 후부터 토마스선교사의 마음속에는 늘 조선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1865년 9월4일 알렉산더 윌리암슨의 주선으로 조선의 자라리(웅진부근으로 추정됨)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두 달 반을 머무르면서 한국말을 배우며 성서를 나눠주었다. 그는 한양에 가서 전도할 마음으로 작은 범선을 타고 한강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났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북경으로 돌아갔다.
토마스의 조선에 대한 뜨거운 선교열을 가진 것은 한국인들이 남달리 종교적이어서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 선교를 시작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의 영예”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이국 땅에서 죽어간 아내에 대한 추억이 가득한 청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한 몫을 담당하였다.
특히 그는 스스로를 서양사람으로는 유일한 조선통이라고 자처하였다. 사실 그는 조선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하였다. 결국 그는 윌리암슨의 뜻을 따라 성서공회의 파견원 자격으로 제너럴 셔먼호에 편승하여 황해도를 향하여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글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서를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을 하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희망이 부풀어오릅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기고 떠나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대동강가에서 조선 선교의 꿈을 안은 채 순교하고 만 것이다.
토마스가 편승한 제너럴 셔먼호는 무장한 상선이었다. 이 배는 대동강에 도착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 이유는 국법으로 교역과 종교의 전파가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양의 관리들은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셔먼호의 선장은 이를 거절하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수심을 측량하였고, 이를 말리던 조선의 관리를 감금하는 무례를 범하였다. 이 사건으로 총격전이 벌어지던 중, 갑자기 대동강의 물이 줄어들면서 셔먼호가 좌초하게 되자 평양의 군대는 대동강의 상류에서 활활 불타는 배를 여러 척 내려보냈고, 셔먼호는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때 토마스도 함께 순교를 당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