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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랜튼과 전덕기 정동을 거점으로 하여 서대문, 남대문 지역으로 선교 영역을 넓힘으로 서울지역 선교 확산에 기여한 스크랜튼 가족은 1891년 3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2년 5월 돌아왔다. 서울에 귀환한 스크랜튼은 정동에 있던 시병원을 남대문시약소가 있는 남대문 안 상동 언덕으로 옮기기로 하였고 병원이외에 사는 집도 상동으로 옮겼다. 외국인들이 살기에 안전한 정동을 포기하면서 거주하기에 불편하고 위험한 상동으로 병원을 옮기려는 스크랜튼을 이해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민중이 있는곳으로 병원을 옮긴다는 것이 스크랜튼의 취지였으며 여기서 스크랜튼의 강한 인간애를 엿볼수가 있다. 그리하여 스크랜튼은 궁궐과 외국 공사관, 양반 저택들이 즐비하여 살기에 안전하고 편리한 ‘귀족 거주지’(royal place)를 .. 더보기
정동시병원-스크랜튼 스크랜튼은 1885년 5월 3일 인천에 도착하게 된다. 서울로 들어온 스크랜튼은 재동에 있던 알렌의 병원, 제중원에서 진료 활동을 시작했다. 스크랜튼은 한국말을 배우면서 자신과 일본에 있는 아펜젤러 가족이 들어와 살 집과 선교 부지를 구했다. 그는 미국 공사 주선으로 6월 중순 공사관 길 건너편에 한옥 기와집을 구입하여 이사한 후 9월부터 찾아오는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래쪽에 기와집 한 채를 더 구입하여 내부를 수리한 후 1886년 6월부터 대문에 ‘미국인 의사병원’이란 간판과 함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떤 병에 걸렸든지 매일 열 점 종에 빈 병을 가지고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란 안내판을 내걸고 환자들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스크랜튼의 병원이 자리를 잡아 갈 때 아펜젤러와 .. 더보기
열리는 선교의 문 갑신정변이후 국내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된 기미를 보이자 일본에 있던 선교사들은 입국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아펜젤러가 1진, 스크랜튼이 2진을 맡기도 하였는데 그에 따라 아펜젤러가 부인과 함께 1885년 3월 23일 요코하마를 출발, 고베(이곳에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합류했다)와 나가사키, 부산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에 인천에 도착하여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곧바로 서울에 들어가지 못했다. 인천 도착 직후 서울의 미국 공사나 인천항에 정박하고 있던 미군 함대 함장으로부터 “아직 서울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서양 여인의 등장이 한국 군중을 흥분시킬 수도 있다.”며 아펜젤러 부인의 서울행을 강력하게 만류하는 바람에 아펜젤러 부부는 닷새 만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반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