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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의 복음 조분이, 김태하 성도는 1904년 3월 17일 교회를 세우기도 뜻을 모으고 기도회를 가졌으며 신자가 증가함에 따라 1905년에는 김태하 성도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05년 김태하 성도의 소유 밭 500평에 초가 4간 두 줄로 예배당을 지어 중간에 간을 두어 남녀 좌석을 구별하여 예배를 드렸다. 기록에 따르면 1905년 어도만 선교사가 설립자로 김성삼 조사와. 김태하 성도가 영수(요즘 장로), 이종태집사로 시무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10년에 신자의 수가 50명으로 증가하자 동천동 이종태 성도의 소유의 땅에 10간의 교회를 신축하여 성장하여 나갔다. 1911년에는 총회가 조직되어 지자 경상노회에 소속되어졌다. 1913 , 2월에는 읍내동에 초간 4간을 매입하여 .. 더보기
한미 관계와 기독교 한·미 관계의 시작 광화문 거리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나는 그 건너편에 알렌의 동상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을 변함없이 갖고 있다. 알렌의 공헌이 근대 한국사에서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로 근대 한국의 역사를 연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수교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882년 5월 한미수호조약이 효시다. 미국과는 조약이 있기 16년 전부터 여러 차례 교섭이 있었다.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했을 때 불에 탄 상선이 미국 선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가장 먼저 수교할 수 있었던 데는 이 같은 여러 차례의 만남이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수호조약이 있던 해에 한불조약, 한영조약, 한독조약 등이 잇따라 맺어지면서 한국은 세계의 일원으로 첫발을.. 더보기
상동교회 상동교회(서철 목사)가 2일 서울 을지로 한 음식점에서 ‘전덕기 목사 서거100주기 추모사업’관련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상동교회는 고인이 담임으로 시무했던 교회로, 일제강점기 주시경 선생과 함께 청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재야의 인물들과 구국운동을 펼쳤던 유서 깊은 곳이다. 감리교 스크랜튼 선교사가 세웠으며, 전 목사는 그의 뒤를 이어 제2대 담임목사가 됐다. 서철 목사는 이날 간담회에서 보혁 갈등과 분열 등으로 대사회적 이미지가 추락한 한국교회에, 가난한 사람과 민족을 위해 행동하는 기독교인의 모범을 보였던 전덕기 목사의 포용력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