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세력이 자연스럽게 팔레스틴에 들어오고 주도권을 쥐게 된 안티파터는 폼페이 장군을 지지하다 BC 48년 그의 몰락을 보면서 시저를 지지한다. 그 결과 시저는 안티파터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로마 시민권까지 주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너무 의존하는 안티파터를 싫어했고 열광적인 유대인에 의해 그는 독살당한다. 유대는 그의 큰아들인 당시 유대 군대 사령관이던 파사엘에게 넘겨졌고 작은 아들인 헤롯은 갈릴리 분봉왕으로 있었다.
이 때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는 그의 왕위 계승권을 시인해 주는 파티안스의 지지를 얻게 된다. 그리하여 대제사장으로 있던 힐카누스와 파사엘은 옥에 갇히게 된다. 파사엘은 자결했으나 헤롯은 피신하여 로마로 가게 되고 거기서 유대 왕으로 임명되어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미 유대를 차지하고 있는 안티고누스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는 로마의 도움으로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드디어 헤롯 대왕으로의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헤롯과 그의 아들들이 통치하는 동안 헬라화 정책은 급진적으로 추진되었으며 헤롯은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불루스 3세의 여동생이며 힐카누스 2세의 손녀이며 마카비 왕가의 공주인 마리암네와도 정략적으로 결혼하기로 했다.
BC 20년에 시작한 예루살렘의 새 성전 건축도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고자 의도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헬라적이며 에돔인이었던 그의 생각과 신분은 유대인들을 기쁘게 할 수 없었다.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던 헤롯은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대제사장에 앉혔다. 그것도 세습제도를 철폐했다.
헤롯은 곳곳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헤롯은 정권 때문에 가족내에 암투를 벌여 부인과 아들들까지도 살해했다. 역사에 남는 잔인함은 BC 6~5년으로 추정되는 때에 베들레헴에서 유아 학살 사건이다.
그 잔인하던 헤롯도 34년의 통치를 마감하고 BC 4년에 죽는다. 헤롯이 죽자 갈릴리 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이곳은 그 이후 유대 민족주의의 온상이 되었다. 갈릴리의 폭동은 헤롯의 큰 아들 아켈라우스가 학살을 단행함으로써 위축되고 말았다.
그는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 총독이 되었으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항의로 로마 정부에 의해 추방되고 말았다. 헤롯의 손자 헤롯아그립바 1세가 유대 왕으로 통치한 3년을 제외하고는 이 나라는 로마 총독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헤롯의 둘째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는 신약성경과 제일 밀접한데 불법으로 결혼했다. 그는 침례 요한을 처형했으며 예수를 심문했던 인물이다. 아랍 공주와 이혼하여 전쟁을 치렀고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했던 사람이다.
헤롯의 셋째 아들인 빌립은 아들 중 최상의 통치자로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증오심 때문에 이 지방으로 잠깐 피신한 적이 있다.
총독들은 세금을 징수하고 주둔군을 통솔하며 재판업무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활동 시대에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10년간 총독으로 있었으나 유대인에 대하여 잔인했다 하여 AD 36년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그 뒤에도 헤롯 아그립바 1세와 2세 그리고 여러 명의 총독들이 유대인들을 통치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헤롯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가 유대의 왕으로 통치한 3년을 제외하고는 (AD 41-44) 이 나라는 로마의 총독들에 의하여 통치 되게 된다.
(AD 6-66) 이 기간 동안에 유대의 민족주의는 점점 강하게 뻗어 나갔으며, 특히 로마인들의 통치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던 제롯당의 생각과 행동으로 드디어 AD 66-70년 유대인의 반란이 일어난다.
원인은 총독인 플로루스가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일부를 탈취하자 유대인들이 격분하여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아그립바 왕의 자체 진압이 실패하고 수리아 총독의 원정 진압도 실패하자 로마에서 보낸 티루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고 만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교의 동질성을 상실케 되고 그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구심점이던 성전 제사가 멈춰지고 유대교의 영향력있는 계급이던 제사장직이 소멸되고 유대인들의 영향력 있는 기관이던 산헤드린이 잠적하고 만다.
그 뒤 주후 115년에 또다시 독립의 시도가 있었으나 트라얀 황제의 진압으로 살육의 전장으로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궤멸되고 로마 제국 전역에 산재한 유대인들은 혹독한 제한 조치를 받게 된다.
팔레스틴은 이교도가 번성하며 유대교의 종식을 맞게 된다.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싸움은 이로써 끝이 났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지고 말았다. 그러나 헬레니즘이 강압적인 힘만으로 유지될 수 없었듯이 유대교도 군대의 힘으로 멸절시킬 수는 없었다.
어떤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종교와 사상은 주변 여건과 환경에 따라 큰 영향을 받게 되고 그 흐름을 형성하여 나간다.
로마 통치하에서의 유대인들은 지중해를 내해로 하는 강력한 세계적 국가를 이룬 로마 속의 한 집단으로 그들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고 사상적으로는 헬라문화의 계속적인 지배하에 있게 된다.
또한 억세게도 자신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신봉하고 수호하기 위하여 몸부림 쳤으며 민족주의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하여 생명을 내걸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