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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선교역사

포항지방의 기독교

포항지방의 기독교

 

    우리나라에서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85년(고종 22)경 부터이다. 1885년 우리나라가 구미제국과 수교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가문호를 개방하여 외국인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어 개신교는 그 포교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1885년 미국 북장로 교회의 선교사 언더우드(H.G.Underwood)와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a)가 인천에 상륙하면서부터 주로 미국계 신교의 각 교파에 속하는 많은 선교사가 입국포교 하였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미국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교회 양식을 본받게 되었으며, 개신교는 정식 국교를 통하여 들어왔기 때문에 사교로 오인될 위험이 없었고 확고한 선교정책에 따라 포교되었으므로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는 합병 후 일제의 탄압으로 수난을 받기 시작하였다.

신민회와 교회를 망라한 서북지방의 민족 세력을 발본색원하려 했던 소위 안악사건, 사내총독암살을 음모했다하여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을 대거 검거한 105인 사건 등이 그 첫 조짐이었다.

 

1915년에 와서 총독부는 사립학교 규칙을 개정하여 많은 기독교 학교의 교육을 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일제의 무단 통치에도 위축되지 않고 1919년 3.1운동에 대거 참여하여 민족적 저항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 당국은 수많은 교회를 파괴하고 성직자와 교인을 살해하였다.

 

    한국의 기독교는 3.1운동을 통화여 민족화·민중화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1운동은 당신의 단순한 항일운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평등·정의의 성서적 이념을 통하여 후일의 역사에도 계속하여 교훈과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지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국어운동, 독립자금조달운동, 교육계몽농촌운동 등을 폭넓게 전개하였다. 일제는 1935년경부터 그들의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써 한국 기독교회에 최대의 멍에를 씌웠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여러 거부자들이 이에 항거하였다. 이와같은 어려운 시대적 여건 속에서도 교인들은 한국의 근대화와 항일운동에 앞장서서 종교적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이 고장에서도 전개되어 가장 먼저 구한 말 1905년에 흥해교회가 이춘옥·김균옥·김성옥·이기우 등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이어 1906년 대도교회, 1907년에 괴동교회·조사리 교회·화봉교회, 1908년에 포항교회·발산교회·대곡교회, 1909년에 송라침례교회·계원침례교회, 1910년에 화진침례교회가 설립되었다.

 


(1)흥해교회(興海敎會)

    1905년 5월 1일 이춘옥·김균옥·김성옥(김상현)등이 대구 합동 공의회 맹의와 선교사로부터 파송을 받은 이기우에게서 복음을 받아 김균옥 집에서 첫 예배를 가졌으며, 당시 초대 교역자는 서성오였다.

 

1908년 2월에 약성동의 초가삼간을 구입하고 벽을 헐어 예배당으로 사용하였으며, 초대 영수로 이춘옥이 피선되었다. 1910년 2대영수로 최기영이 피선되고, 1912년 3월 중성1동으로 교회를 이전하여 김문여 전도사가 2년간 시무하고, 1914년 3월 중성동 소재 대지 250평에 40평 목조건물로 금석문 전도사가 2년간 시무하였다.

 

    1916년 2월 박문찬 목사가 부임하여 9년간 시무하게 되고, 1917년 5월에 교회부설로 사립 명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설립자 : 편도현) 1920년 3월 김만성 전도사가 부임하고, 1922년 김대현, 송문수가 1926년에 김호용이 장로장립이 되었다.

 

1926년 3월 대폭풍으로 교회가 완전 붕괴되어, 동년 5월에 학성동(현위치) 145번지로 이전하여 대지400여평에 목조건물 50평의 교회를 신축하여, 박영조 목사가 10년간 시무하게 되었다.

 

    1936년 건축위원회를 결성하여(위원장:송문수) 교회를 70여평의 현대식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하였다. 현재의 교회 명칭은 흥해중앙교회이다.


 

(2)대도교회

    포항에 기독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904년 봄 미국인 선교사 맹의와(孟義窩)와 조사(助師:원래 어학을 가르치고, 선교사를 수행하며 자연히 선교사의 교회일 처리까지 관여하는 안수받지 않은 목사격임) 김병호(金炳鎬)의 전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라마교(羅馬敎)서적을 다년간 연구하던 최경언(崔景彦)·김난수(金蘭洙)가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귀주(歸主)하자 정일찬(鄭日贊)·공시진(孔時振)·윤기효(尹基哮)·김병수(金炳洙) 등이 잇따라 믿게 되어 서숙(書塾)에서 임시로 집회하였다. 이후 1906년 초가 3간을 매수하여 예배당을 마련함으로써 대도교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설립자 맹의와(孟義窩) 조사 서성오(徐聖五) 및 집사 김난수(金蘭洙)가 사무를 시작하였다.

 

    이에 교세가 확장되자 1919년 기와집 6간을 신축하여 예배를 보다가 1945년 광복을 새로 맞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대도교회는 처음 대도동 511번지에서 466번지의 3으로 옮겼다가 다시 426번지로 옮겨(1970년) 오늘에 이르고 있다.

 


 

(3)포항교회(浦項敎會)

    1905년 安義窩(안의와 : James E Adams)목사와 서성오(徐聖五)·김상오가 이 고장에 와서 전도한 후 1906년 맹의와 선교사가 포항지방 담당 순회선교사로 왕래하면서 포항지역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1908년 1월 5일 포항교회를 조직하여 중앙동 451번지에 초가 3간을 구입하고 교회당을 설치한 것이 오늘날 포항제일교회의 전신이 된 것이다. 당시 당회장 맹의와(孟義窩) 목사, 조사 황경선(黃敬善) ·김순여(金順汝), 영수(領袖:교회의 대표자로서 선교사 부재시에 교회의 제반 일을 총괄했던 안수 받지 않은 장로격임) 이찬유(李贊裕) 집사 남문오(南文五)가 시무하였다. 이때 통영에서 온 김상오가 개척활동에 열성을 다하였다.

 

    1910년 초가 5간을 구입하여 예배당을 확장하였다. 1911년에는 포항교회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사립 영흥학교를 설립하고, 황경선(黃敬善) 조사를 파송하여 칠포교회를 개척하였다.

    1918년에 김병호(金炳鎬) 목사가 부임하고, 최경성(崔景成)이 장로가 되어 당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 교인들이 3.1운동에 참여하여 포항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포항시사 제2장 4절에 3.1운동 참조)모든 여건이 어려웠던 일제의 탄압 하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한 것은 사립영흥학교를 설립하여 이 고장의 2세 교육을 주도한 것과 함께 포항교회사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포항사의 횃불로서 길이 빛날 것이다.

 

    포항교회는 1933년 연와판제 2층 190평의 교회당을 신축하여 교세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1935년 이후 노골화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각 지방의 기독교 학교가 자진 폐교되거나 일제의 강압으로 폐교되는 수난기에 포항교회는 1937년 사립 영흥학교의 경영권을 타인에게 넘겨주고 폐교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1944년 성결교회와 합동한 후 광복을 맞았다.

 

   

                     

 

<일제강점기의 포항지역 교회현황>

 

지방명

 교회명

설립연도

 설립자 및 최초의 신도

 소재지

  비   고

 포항

대도교회

1906년

맹의와 선교사, 서성오 조사, 김난수 집사

대도 426

1904년 맹의와 선교사와 조사 김병호의 전도에서 비롯

포항교회

1908년

맹의와 선교사, 황경선 김순여 조사, 김찬유 영수, 남문오 집사

중앙동

 451

1905년 김상오가 신주 전도함

포항성결교회

1932년

오태상 전도사와 18명의 신도로 창설(1937년 죽도동에 24평의 교회 신축 이전)

죽도동

양이록 유도택 박장의 전도사 포교에 전력

구룡포

구룡포교회

1925년

박덕일 목사, 이억조 이부감 김기수

구룡포리

 463

 

흥해

흥해교회

1905년

맹의와 선교사, 서성오 이춘옥 김균옥 김성옥 이기우

학성리

 145

현 흥해중앙교회와 흥해제일교회 전신

칠포교회

1911년

맹의와 선교사, 황경선 김홍규 김필오 조사, 장원식 영수

칠포리

 570

1905년 김필오가 신주 전도함

연일

괴동교회

1907년

맹의와 선교사, 서성오 조사, 설립자 박군현, 영수 박문찬, 집사 박천필

괴동동

초명은 장흥교회

현재는 대송교회

중명교회

1913년

윤감찰이 중간1동 540번지에 세움

중명2동

 633

1916년에 중명으로 옮김

연일교회

1920년

이상기 장로, 송만현 영수, 이영수 박영곤 송영수

생지동

 189

 

효자교회

1921년

역대 장안 백화기 조동화 김창복 김원찬 이영수 정효준

효자동

 462

 

신광

신광교회

1936년

이춘중 목사 전도

토성동

 480-3

 

청하

청하교회

1914년

오용간 정우용 외 5인

덕성리

255-3

현 청하제일교회

월포침례교회

1915년

서옥이

월포리 245

 

유계교회

1917년

이상호

유계리 466

 

동아기독교회

1921년

역대 장안 김용수 김상호 황성진

덕천리

현 청하침례교회

청진교회

1941년

집사 김분선 정임순

청진리 307

 

송라

조사리교회

1907년

허담

조사리

58-2

 

송라침례교회

1909년

정영길 이종순

광천2리 69

 

화진침례교회

1910년

오요한

화진리

32-1

 

대전리교회

1913년

이익호 설립, 초대교인 안덕환 안천종 안치종 김진수

대전리 318

 

죽장

죽장교회

1917년

임우학

입암리

 858-175

 

상옥교회

1919년

오기주 김창호 정진술

상옥리

 1156

 

하사교회

1921년

박재관

하사리 4

 

동해

발산교회

1908년

맹의와 선교사, 박천필

발산1리

 368

 

제일침례교회

1916년

강석주

임곡2리

 495-3

 

지행

(현 장기)

계원침례교회

1909년

평신도 성주환 설립

계원2리

 

신계침례교회

1912년

초대목사 제영기

신계리

 

방산교회

1912년

안의와 선교사, 금석호 오상문 윤재근

방산리

장기교회 전신

장기교회

1915년

영수 윤재근

읍내리

 108-1

 

대보

대보교회

1923년

 

대보리

 859-10

 

대동배교회

1934년

 

대보리 271

 

기계

화봉교회

1907년

윤하곤 전도, 황보덕신 가에서 창립예배

화봉동

 

대곡교회

1908년

맹의와 선교사, 서성오 조사, 영수 정운호, 집사 정민조

대곡리

현 기북교회(용기동 111)의 전신

성법교회

1913년

맹의와 선교사, 김순여 박복상 권상용

성법리

 787

 

구지교회

1926년

안두화 선교사, 정종윤 전도사

구지동

 

기계교회

1932년

박달만(1929년 박달만 가에서 첫 예배)

현내동

 473-2

현 기계제일교회

사산교회

1927년

이장영 영수, 신기석

내단1리

현 내단교회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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