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중세에서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낙 인 찍힌 개인이나 종교집단은 적지 않다. 이 단이란 종교상,사상상의 권력중추에 이견울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갖다 붙인 대명사라 하 겠다. 종교집단이나 사상집단에는 거의 항상 이라 할 만큼 그러한 이단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12.3세기까지는 발도파와 알비주아파가 가 장 대표적인 이단으로서 손꼽히지만, 종교개 혁의 선구라는 관점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은 14,5세기에 나타난 위클리프와 후스다.
위클리프(내예〜내용신)는 영국출생으로 옥 스포드대학의 교수였는데,성서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올 이상으로 하여 로마교회의 교의 나 제도,그리고 부의 소유에 대해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평등한 신자의 집합체 므로 로마교황의 거대한 권력이나,속인과 구 별된 수도사의 제도 둥은 부당하고,또 무소 유를 본래의 모습으로 하는 교회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며, 따라서 정부의 손으로 몰수해야 한다는 것이 었다.
그 밖에도 그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로 변질한다는 '거룩한 변화설'을 비판했고, 성자‘성유물의 숭배, 면죄부의 구입, 순례 둥을 좋은 행동이라 할 수 없다고 공격했다. 그가 성서를 영어로 번역해서 민중이 성서와 가까이 할 수 있게 한 것도, 그의 의도가 어 디에 있었는지를 알게 하는 일이다.
그는 로마교황으로부터 곧 이단이라는 선고 를 받았으나,왕실의 보호를 받아 목숨을 보 전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로마교회가 지난 날과 같이 멋대로 이단을 탄압할 수 없게 되 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활동에 이어 '와트 타일러의 난'이라 불리는 농민폭동이 일어나 위클리프는 그 폭 동과의 관계를 의심받고 왕실의 보호도 잃게 되었지만,그가 뿌린 씨는 죽지 않았다.
그의 주장은 교회와 정치의 압박올 받으면 서도 로란드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이어졌고 민중 가운데로 전해져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클리프가 뿌린 씨는 보헤미아라는 의외의 곳에서 보다 큰 열매를 맺었다.
위클리프의 저술은 옥스포드대학에서 공부 하던 보헤미아인에 의해 본국으로 전해져 프 라하대학에서 열심히 연구되었다. 거기서 성 장한 것이 프라하대학의 학장이 된 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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