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아골 골짜기에서 희망의 문을 여시는 분이다.
이것을 고백할 수 있었던 선교사가 있으니, 바로 메리 스크랜톤 여사
스크랜튼은 40세에, 사랑했던 남편을 잃었다.
한국개신교 선교사업이 시작되는 즈음에
하나님은 그녀를 위로하시며
미감리교회 한국최초의 여선교사로
세우셨다.
그녀의 아들 역시 미감리회 한국최초의 의료선교사로 부르심으로써 복에다 복을 더하신 것이다.
1885년 6월 20일 서울에 도착한 그녀는, 곧 정동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준비하며 여성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스크랜튼은 1886년 5월 31일,
자신의 거처에서 한 명의 여학생을 놓고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나는 가난한 고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즉시 내 비좁은 사실에 한 명을 수용하
기로 결정하였다”라는 당시 그녀의 기록이, 한국 최초의 근대적 여성교육의 태
동을 담담히 말해주고 있다.
물론 당시 한국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보수적인 폐쇄성 때문에, 그녀의 초기 여성교육은 뛰어넘어야 할 난관이 많았고, 그에 따른 고통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1887년 학생 수는 7명으로 증가하였고, 명성왕후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음으로써 본격적인 여성교육의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 5월 31일, 이화학당은 창립 35주년 기념식에서 그녀의 여성교육을 향한 일념과 그 공로에 대해 이렇게 치하했다.
“우리의 사회가 도원의 봄꿈을 깨지 못하고
여자의 새 교육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때에,
푸른 바다 수만 리 묘망한 바다를 건너온 손님,
노랑머리 푸른 눈의 미국사람 시란돈(스크랜톤)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각 지역에 여성교육기관을 마련하고 여성 계몽운동의 선봉에 섰던 스크랜톤 부인은 교육 이외에도 전도활동에 동분서주하였습니다.
그녀는 서울은 물론 소원, 장지내, 도고개, 오산, 여주, 이천 등 여러 지역에 전도활동을 전개하였고,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스크랜튼은 77세에 별세했는데 그녀의 찬란한 업적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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