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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독교

첫 개신교 중국선교사 Robert Morrison


    모리슨은 개신교 첫 중국선교사로써 1807년 9월 1일, 광동에 도착하였다.

 

 중국선교의 문은 굳게 닫혀고, 광동(Canton)과 마카오 일부 지역만 무역 위해 외국인 거주케 했으나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요 외국인이 중국인을 접해도 안되며, 중국인 외국을 접해도 극형에 처하는 중국선교사로 중국 땅을 밟은 것이다.

 

런던선교회는 중국선교를 위해 당시 1786년 영국령지로 편입된 페낭(Penang, Wales 섬 지방)의 중국 이주자들에게 선교하는 것을 계획했지만 직접 중국 본토로 파송키로 결정하였다.(B.p3)

   모리슨은 1782년1월 5일, 경건한 농부의가정 영국 노덤버랜드 지방 모퍼스(Morpeth)에서 팔남매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부친은 모리슨이 3세때 뉴캐스틀로 이사하여 구둣골 제조업에 종사하며 뉴캐스틀장로교회에 출석하였고, 20세때(1802) 전도자의 길 가기로 결심하였고 1803년 런던의 혹스톤(Hoxton Academy)에서 신학 수업중 선교사 활동 소개지인 “에딘버러 평론‘지를 읽고 선교사로 결심하였다.

 

1804년 런던선교회로 찾아가 선교사 훈련학교인 고스포트(Gosport)의 험프셔(Humpshire Academy)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아프리카로 지망했으나 보그스(Dr Bogues)학장의 권고로 중국으로 변경하였다.

 

   당시 런던선교회(1795년 설립)는 영국교회 모즐리(William mosley)목사가 1798년3월7일 중국어 성경번역 위한 선교회 설립을 제의하엿고, 1804년 런던선교회 총무는 모즐리목사의 중국선교와 중국어 성경번역 제안서를 받앗다. 이때 스코트(Mr Scott)로부터 말라카 해협 영궁영지가된 웰레스섬(Wales Island, penang)에 선교부를 설치 추천하는 서신을 보냈다. 중국어로 성서번역 위한 최상의 지역을 웨레스섬(페낭)이나 마카오라하였다.(J.p71)

 

이에따라 런던선교회 1805년 5월 9일, 제11차 총회에서 성서번역을 주임무로하는 중국선교사 파송을 결의하였다.(J.p72) 당시 중국은 외국인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엄금하였고 사향으로 다스렸으며 외국인들은 무역을 목적으로 국내 거주를 금지하고 단지 광동 일부 지역으로 제한 했었다.(J.p72) 1805년 하드캐스틀(Mr. Hardcastle) 선교회 회계도 중국에 대해 소개하면서 복음을 직접 선교하기는 어렵고 위험하나 언어를 배워 성경을 번역하여 3억이 넘는 이교도들에게 복음전해야 한다고 선교회에 보고하여 언젠가는 복음의 문이 열릴 것을 준비하기 위해 성서번역 위한 선교사를 파송키로 하였다. (L.p403, H.p2))

 

   모리슨은 1805년 성바돌로뮤(St Batholomew)에서 의학, 그린위치에서 천문학을 배웠고,모즐리목사의 소개로 당시 광동에서 유학 온 용삼탁을 만나 중국어를 익히며 중국선교 준비하였다. 선교사훈련을 마친 모리슨은 런던선교회의 최종 심사인 면접을 받앗다. 런던선교회는 구체적인 회심체험을 중요시하였고 이를 확인하는 면접을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한다.

 

1807년1월 8일 안수를 받고, 영국 동인도 회사의 거부로 영국배를 타지 못하고(J.p84), 미국배를 아고 1월 31일 출항하여 109일만인 4월 20일 뉴욕에 도착하였다.

 

 중국가는 배편과 거주 허가 받기 위해 필라델피아 회중교회 본부를 찾아갔고, 회중교회를 워싱턴 정부에 소개해 대통령 제페슨은 국무장관 마진슨장관에 보내 광동 주재 아링턴(Arrington)영사에 소개장을 받았고, 교회에서 중국가는 선박을 알선 주며 배삯 1천불도 무료로 해주어 5월 12일 프라이던트호를 타고 뉴욕을 출항하였다.

 

모리슨은 갑판에서 중국어 공부하며 주일에는 선원과 승객들을 모아 예배 인도하였으며, 인도양과 말라카 해협을거쳐 1807년 9월 1일 광동에 도착한 것이다.

 

   광도의 영국영사를 찾아 런던선교회의 소개장을 보여줬으나 “외국인과 상종하는 중국인은 사형이다”고 거절 당했으며, 동인도 회사에서도 “동인도 회사에서 허가한 사람 외에는 광동에 거주할 수 없고 캐토릭도 배척한다”고 거절 강했다. 모리슨은 아링턴 미국영사를 찾아가 국무장관의 소개서를 제시했다. 미국 영사는 모리슨을 환영하고 영사관에 거주 토록 조치해 주었고, 미국화물관리인 메서(messrs), 밀너(Milnor), 불(Bull)이 옛 프랑스공장을 제공해 주어 여기서 기거하며 중국어 공부와 성서번역에 전념했고 중국인에 복음 전도의 기회를 엿보았다..(L.p405).

 

  "나는 여기서 성서번역에 도움이 되는 언어습득을 이루며 이 일에 헌신할 목적으로 나의 시간과 정력을 모두 쏟았다.“(1808.1.10.일기. L.p405)

 

   "나는 예수에게만 믿음을 고백토록 중국인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만 알고 있으나 복음의 구조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1808.5.3.일기L.p406)

 

  1808년6월월1일, 마카오로 옮겨 영국공장장 로버트(Mr Roberts)의 소개로 북경에서 온 캐토릭 신자인 아벨 윤을 어학선생으로 소개받아 모리슨은 북경어(Mandarin)를 습득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중국어 자전과 성서번역에 착수하였다. (l.p406))

 

마카오에서 용삼탁과 만났고, 러벨러셀(Mr Lovelesess)의 소개로 몰턴을 만났다. 의사인 몰턴(Mr Morton)은 아일랜드인 개신교 신자로 가족과 함께 마카오에 부임하여 모리슨과 친밀케 되고 그의 집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며 친밀케 되었다.(L.p406)

 

    “문법은 출판을 준비 중에 있으며, 사전은 날마다 완성되가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부분적으로 인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이 경솔하거나 정확치 못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공부를 더 깊히하고 있습니다.”(1808년말 편지)

 

    모리슨은 마카오에서의 신변 안정문제, 건강문제를 말했다. 중국인 두사람의 보호 아래 그것도 달밤에 거닐어야 했고, 마카오 사람들이 말 부치기도 싫어했다고 어려움을 말하기도 했다.(L.p407)

  

 

모리슨은 몰턴 가족이 마카오 정착에 어려움으로 페낭으로 이주되 그의 장녀 메리(Miss Mary Morton)양과 1809년 2월 20일 결혼하였고, 영국 도인도회사의 중국어 통역관으로 취직이되 신분 보장과 연봉 L500파운드를 받게되 생활 안정을 갖고 광동과 마카오에 거주 할 수 있게 되어 성서번역과 인쇄 사역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L.407, H.p8)) 모리슨은 언어를 습득할 좋은 기회요 회사의 신뢰 속에 업무 수행하며 중국인들과 공식 접촉이 가능해졌고 그들의 언어와 생활습성을 익히는 좋은 기회가 되엇다.(Milne, 'Life of Morrison", p241). 여기서 중국어 자전, 중국어 문법, 성경번역이 이루어져 사도행전이 번역되어 1810년9월 중국에서, 중국인에 의해 첫 인쇄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9월에, 나는 사도행전을 희랍어 본문에서 주의 깊게 번역하여 중국 인쇄공을 통해 1000부를 목판 인쇄하였고 비용은 521불이 들었다. 외국인 나의 신분에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없기에 중지 할 수 없었다. ”(1811.1.7. 선교회에 보낸 편지)

  밀른은 당시의 어려움을 기록했다.

“사도행전 인쇄비는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며, 신약전서 인쇄비 보다 더 비싸 한 장 인쇄비에 50불이 더 들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중국인 정부 관리들이 모든 외국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상황에서 기독교 서적이 중국인 자신들에 의해 다른 중국 서적의 일반 가격으로 인쇄할 수 있다는 것은 예상 할 수도 없는 일이다.”(L.p409)

 

   모리슨은 성서번역의 어려움을 기록했다.

   “나의 주요 사역은 올해 누가복음을 번역하는 것이다. 나는 중국인들이 조판하여 인쇄한 종교문서(전도책자)들의 수천권을 인쇄 했다. 나는 중국어로 교리문답서를 번역하여 인쇄키 위해 선교부에 1부를 보냈다. 주일날, 내집에서 중국인들에게 설교하였고 그들은 예절을 지켜서 진지하게 참여하였고 이러한 분위기가 진리의 영향력 임을 느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와 개종한 것으로 기뻐하기는 이르다. 이러시 위해서는 기독교 전파에 대한 황제의 칙령이 내려져야 한다. 4며의 캐토릭 선교사들이 북경에서 추방 되었다.”("Life of Morrison, p298)

 

   모리슨은 여기에서 자유롭게 중국 선교가 이루어질 선교기지를 찾았고, 중국인들이 이주한 동남아시아로 옮겨 성서번역과 문서출판, 중국선교사를 양성할 교육기관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다.(H.p7) 모리슨은 런던선교회로 부터 말라카(malacca)나 광동(Canton)에 선교 교두보(Bridgehead)를 설치하여 더 많은 선교사를 동아시아로 보낼 수 있도록 하라는 제의를 받고  있었다.(B.p10) 선교회에서도 선교기지(Mission bases)로 가능한 지역을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유능한 밀른(W. Milne)을 선교사로 선발하고 파송 준비하고 있었다.(B.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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