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헤론 의사의 5년 사역은 전반기 2년 6개월(1885년 6월∼1887년 11월)과 알렌이 미국으로 떠난 후 제중원 단독 원장으로 일하던 후반기 2년 6개월(1887년 11월∼1890년 7월)로 나뉜다. 언더우드의 직접 전도를 지지한 전반기 선교 활동을 연대순으로 정리해보자.
유니언교회 창립 회원
헤론 부부는 1885년 6월 21일 스크랜턴 가족과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그 날 주일 저녁 알렌 집에서 장·감 선교사들(알렌 부부, 헤론 부부, 스크랜턴 대부인)이 함께 모여 첫 공식 연합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가 오기 전 알렌, 언더우드, 스크랜턴이 주일예배를 드렸지만 그 날 정규 예배를 시작했다. 이 예배가 발전하여 외국인과 선교사를 위한 서울유니언교회가 되었다.
10월 11일에는 일본성서협회 총무 루미스 목사가 첫 성찬식을 집례했다. 주일 오후 예배에는 미국 외교관과 군인, 일본인도 참석했다. 1886년 4월 25일에는 스크랜턴의 딸 마리온과 아펜젤러의 딸 엘리스가 유아세례를 받았고, 일본인 하야카와가 세례를 받았다. 교회는 여름에 예배당을 건축한 후 11월 첫 담임목사로 아펜젤러를 세웠다(연표 중 왼쪽 아래).
알렌은 1886년 3월 29일자 일기에 제중원 부속의학교가 알렌 헤론 언더우드를 교수로 개교되었다고 썼다(뒷날 편찬한 연표에는 4월 10일 ‘관립의학교’가 개설됐다고 썼다). 개교 당시 전국에서 선발된 16명의 학생들은 4개월간 예과를 마친 후 12명이 본과로 진학했다. 알렌은 화학, 헤론은 의학 실무, 언더우드는 영어와 물리를 가르쳤다. 영어로 강의했으나, 독신인 언더우드는 한국어를 빨리 배워 점차 한국어로 강의했다.
헤론은 제중원이 구리개(현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자리)로 옮겨간 후 의학생들에게 의술을 가르쳤다. 정동 사택에서 가는 거리는 도보 30분으로 제동 제중원(현 헌법재판소 자리) 때보다 조금 가까웠다. 그러나 1887년 11월 알렌이 대미 조선사절단(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을 이완용, 이하영, 이상재 등이 수행)의 참사관으로 한국을 떠나고, 헤론이 제중원 진료와 외국인 진료를 겸하면서 강의를 중단했다. 의학당은 1887년 말 예과 수준의 영어 학교로 전락했다.
언더우드 고아원 설립
1886년 1월 언더우드와 헤론은 순수 선교기관인 고아원을 계획했다. 정부의 허락을 받아 5월 11일 정동에 소년 고아원을 개원했다. 개신교의 첫 사회선교 기관으로 예수교학당으로 발전했다. 헤론은 1887년 3월 언더우드가 일본에 2주일 간 요양 갔을 때 고아원을 맡아 운영했다. 1888년 영아소동 때 고아원 아이들 때문에 헛소문이 나기도 했다.
1886년 여름 콜레라가 유행하자 헤론은 ‘콜레라 약’을 제조해 주사기로 투입해 낫게 했다. 헤론의 ‘침’으로 콜레라가 나은 한 사람은 “살았소, 살았소”하며 직접 찾아와 감사 인사를 했다. 7월 18일 헤론의 집에서는 첫 개신교 신자인 노춘경이 세례를 받았다. 헤론의 딸 새라가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직 아펜젤러가 유니언교회에 취임하기 전이므로, 언더우드가 세례를 주었다. 헤론은 이 사건을 본국에 보고하지 않았다. 노씨 개종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전도할 만큼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것도 맘에 걸렸다. 노씨는 세례 후 시골에 내려갔으므로 1886년 말까지 서울에 한국인 개종자가 없었다.
소래교인 3명의 비밀 세례 지지
정부 기관인 제중원과 의학교에서 헤론은 의술이나 치료에 대해서만 대화했다. 그러나 1887년 1월 만주의 로스 목사가 사역한 열매인 3명의 한국인(서경조, 정공빈, 최명오)이 소래에서 서울로 와서 세례를 요청했다. “왕이 우리를 처형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이유로 왕이 내 목을 자른다고 해도 괜찮습니다”라는 고백 앞에 언더우드는 세례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목숨 건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대한 지식과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진지한 태도에 놀란 헤론은 기도했다. “첫 열매로 이런 사람들을 보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이들 각자가 자기 백성에게 선교사가 되고, 의의 교사가 되게 해 주옵소서”(1887년 1월 24일 편지)
1887년 3월 초 언더우드가 요양 차 일본에 갔을 때, 헤론은 고아원을 책임지는 동시에 제중원 의학교에서 언더우드가 맡았던 영어와 물리를 가르치게 되었고 관리와 학생을 만나는 시간이 늘었다. 그리고 집으로 찾아오는 한국인 환자도 늘었다. 헤론의 한국어도 제법 늘어 알렌의 말을 통역하기도 했다. 그래서 헤론은 언더우드처럼 ‘기독교를 주제로 한국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에게 한문 성경과 복음서를 나누어’(1887년 5월 1일 편지) 주었다. 헤론의 첫 직접 전도 활동이었다.
정동교회의 조직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27일 만주의 로스 목사를 초대한 가운데 한국인 세례교인 14명--백홍준(의주), 서상륜(소래), 노춘경(서울), 서경조 등(소래)--으로 정동 사랑방에서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를 조직했다. 2명을 장로로 선출해 일종의 전국구 당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두 장로는 곧 치리를 받아 안수를 받지 못했다(첫 안수장로는 1900년 서경조였다).
그러나 11월 알렌이 미국으로 가고 제중원과 외국인 진료를 단독으로 맡은 헤론은 점차 신중한 태도로 바뀌었다. 1887년 11월 13일 헤론은 국립병원에서 선교 사역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되도록 직접적인 사역을 시작해야 하겠지만 종교 자유가 허용될 때까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1888년 봄에 헤론 부인이 여성 성경공부를 자택에서 시작하고 여학교를 시작했으나 질환으로 중단해야 했다. 헤론의 신중론을 비난하던 언더우드도 1888년 6월 영아소동이 터지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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