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 교회 안에서는 ‘역사의 재발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광장동 장신대에서 ‘마포삼열 선교사 흉상 제막 및 이장예식’이 있었다.
24일에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서 ‘하디 선교사 기념비 제막식’이 열린다. 지난 16일에는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서상륜·이수정 기념비 건립 발기인 대회’가 열려 참석자들의 지대한 관심과 호응 속에 진행됐다.
이들의 기념비 제막식은 6월20일 총신대 양지캠퍼스 내 소래교회에서 있을 예정이다.
1885년 4월5일 부활 주일.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땅에 처음 복음을 들고 찾아왔다.
그러나 음악에 서곡이 있듯 ‘외국 선교사의 전래’가 있기 전 은총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는 ‘내국 신자의 준비’가 있었다.
기독교 복음 전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자국의 성경 번역과 보급이다.
선교 초기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번역,보급하던 사명자들은 성령의 사람이었다. 그 핵심 인물이 서상륜·이수정이다.
홍삼 장사를 하던 서상륜은 1878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로스 선교사를 만나 신앙을 받아들인 뒤 1882년 최초의 한글판 쪽복음 성경인 ‘누가복음서’를 번역하고 발간,보급했다.
그가 만주에서 조선에 올 때 성경을 소지한 것이 검문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개신교 최초의 소래교회는 바로 그에 의해 세워졌다.
서상륜
로스선교사를 만난후 1882년
최초의 한글 성경인 [누가복음서]를 번역
홍문관 교리였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이수정은 덕망과 학식을 갖춘 온건 개화파 양반 학자였다. 그는 임오군란 중에 민비를 구한 공로로 1882년 일본에 건너갔다가 신앙을 받아들인다.
그가 일본에서 가장 크게 감명받은 것은 일본의 근대화가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1884년 그는 일본에서 한글판 ‘마가복음’을 번역,출간한다.
그러나 1886년 그는 귀국한 즉시 수구파 정적의 손에 무참히 처형당함으로써 순교했다.
새벽이 없는 아침은 없다.
언더우드·아펜젤러가 복음의 아침을 열었다면 서상륜·이수정은 새벽의 밀알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아침은 우연히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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