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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 선교사

조직과 행정력에 뛰어난 질레트 선교사는 YMCA회관 건립을 위해 기금을 모금하고 종로회관을 건축했다. 그리고 1908년 12월 3일에 개관하여 종로 YMCA시대를 열었다.

 

 

 


강당과 체육실 등 3층 벽돌 양옥 회관을 준공했다. 이 회관은 실내체육 발전에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체육실의 역할에 대하여 반하트 선교사는 1919년 9월 보고에서 “추운 겨울에도 쉼 없이 운동을 했다. 몇 해 전 만해도 신사들과 그 자제들은 운동경기를 천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일변하여 모든 신사들이 운동을 즐기게 되었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YMCA의 공헌이다. 사실상 한국에서 연중 무휴로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은 YMCA 밖에 없다”고 했다.(자료: YMCA 체육 운동의 발자취)

질레트 선교사는 배재학당의 기독학생회를 학생 YMCA로 개편하고,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 민족 운동가를 YMCA에 영입하였으며, 자문위원회도 구성했다. 조선을 끔찍이 사랑했던 그는 이름도 길례태(吉禮泰)로 바꾸고 사람들 앞에서 “한국에 뼈를 묻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약속은 지켜질 수가 없었다. 그가 왕성하게 YMCA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3년 6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1911년 일제는 요인 암살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105명을 체포,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른바 105인사건이다.

 

그동안 YMCA활동을 통해서 암암리에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한 질레트는 날조된 이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영국 에딘버러에 있는 국제기독교선교협의회에 발송했다가 적발돼 추방되었고, 이후 그는 그렇게 그리워하던 조선 땅을 밟아보지 못하였다.

그후 중국의 남경, 북경, 상해 등지에서 YMCA 총무로 활동하다가 1932년에 퇴임하여,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상해에 머물며 외국인교회 목사로 사역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 재정지원도 담당했는데,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많은 독립자금을 모금되기도 했다.

1936년 태국의 방콕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질레트는 1937년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1938년 11월 26일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66세에 별세하여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지난해 한국야구 100주년 기념식에 질레트의 외손자 로런스 허바드씨가 참석해 외조부 대신 공로패를 받았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외조부가 한국인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사실을 알고 있다”며 “잊지않고 초대해준 주최측에 깊은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우리는 야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근대체육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정착시킨 근대 체육의 아버지 질레트 선교사를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