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폐습의 타파(打破)- 위클리프

좋은 인생 2014. 11. 15. 11:50

폐습의 타파(打破)


위클리프는 후세의 다른 개혁자들처럼 그의 사업의 초기에는 자기가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는 고의적으로 로마교에 반대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리에 투신하게 되자 그는 필연적으로 거짓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법왕권의 오류가 분명해지면 질수록 더욱 열렬하게 성경의 교훈을 설명하였다. 


그는 로마교가 사람의 유전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을 보고 성경을 저버린 신부들을 담대하게 질책하고 성경을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과 성경의 권위를 교회 안에서 다시 한 번 확립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재간 있고 열성 있는 교사요 웅변적인 설교자였으며, 자기가 전한 진리를 자기의 일상 생활로써 실증했다. 


성경 지식, 그의 논증의 설득력, 그의 깨끗한 생애, 그의 변함없는 용기와 성실성 등은 일반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다. 그러므로 로마교에 편만한 불법을 눈으로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래의 신앙에 불만을 가졌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위클리프가 밝히 제시한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그 개혁자가 그들 자신들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고 심히 분노하였다.


위클리프는 오류를 발견하는 데 예민한 사람이었으므로 로마교의 권위로 승인한 여러 가지 악폐에 대하여 기탄없이 공격하였다. 


그는 국왕의 왕실 목사로 재직할 당시에 법왕이 영국 국왕에게 요구하는 조공에 대하여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에 섰으며, 법왕이 세속적 통치자를 지배하는 권위를 가지는 것은 이성과 계시에 어긋나는 일임을 보여 주었다. 


법왕의 요구는 심한 의분을 일으켰었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그 나라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왕과 귀족들은 속권에 대한 법왕의 요구를 부인하고 조공의 지불을 거절하는 일에 결속하였다. 


이와 같이 영국에서는 법왕 최상권에 효과적인 타격을 입혔다.



승단(僧團)의 부패와 타락


이 개혁자가 오랜 시일을 두고 단호한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온 또 하나의 악폐는 탁발승단(托鉢僧團) 제도였다. 


이 탁발승들은 영국 안에 너무 많이 있었으므로 국가의 번영에 큰 장애가 되고 있었다. 

산업, 교육, 도덕이 모두 그 쇠퇴의 영향을 입고 있었다. 


승려들의 게으른 생활과 구걸은 사람들에게 재정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주었을 뿐 아니라 유용한 노동을 멸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부도덕하고 타락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탁발승의 영향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은둔 생활(隱遁生活)에 몸을 바치도록 권유를 받았다. 그들은 부모와 합의하지도 않고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들의 명령을 거스르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초대 로마교의 어떤 교부(敎父)는 자녀로서의 사랑이나 의무에 대한 의리보다도 수도 생활(修道生活)이 더욱 중요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비록 너의 아버지가 너의 문 앞에 누워서 울고 슬퍼할지라도, 너의 어머니가 너를 낳았던 몸과 너를 젖먹이던 가슴을 보일지라도, 너는 그들을 발로 짓밟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곧장 달려가야 한다.” 후일에 루터는 이에 대하여 이런 “무서운 비인도적 행위는 그리스도인과 사람의 행위라기보다는 차라리 이리나 폭군의 행위”(Barnas Sears, The Life of Luther, pp.70, 69)로 생각된다고 말하였다. 


이런 일들이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 대하여 무정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옛날 바리새교인들처럼 그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가정들은 황폐되었으며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심지어 대학교의 학생들까지도 승려들의 거짓된 말에 속아서 그들의 대열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런 후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애를 해롭게 하고 부모에게 슬픔을 안겨준 것을 알고 후회하게 되었으나 일단 올무에 단단히 걸린 다음에는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없었다. 


많은 부모들은 승려들의 영향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아들들을 대학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문의 위대한 중심지에 모여드는 학생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학교들은 쇠퇴하여 갔고 무지(無知)는 편만하게 되었다.


법왕은 승려들에게 사람들의 자복을 듣고 용서해 주는 권세를 주었다. 

이것이 또한 죄악의 큰 원인이 되었다. 


승려들은 그들의 사복을 채우기 위하여 사람들이 어떠한 죄악을 고백하든지 곧 사면하여 주므로 그 결과로 가장 악한 죄악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병자와 가난한 자들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마땅히 그들의 궁핍을 제거하는 일에 쓰여져야 할 선물들은 승려들에게로 넘어갔다. 


승려들은 위협으로 사람들의 시여(施與)를 강요하였고, 그 일을 거절하여 기부하지 않는 자에게는 불온한 말을 하며 비난하였다. 


표면상으로는 빈곤하다고 말하지만, 승려들의 재산은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그들의 훌륭한 저택과 사치스러운 식탁은 백성들의 빈곤을 더욱 심하게 해주었다. 


그들 자신은 향락과 사치에 빠져 시간을 보내면서, 기괴한 이야기와 옛 전설과 백성들을 경박하게 만들어 주는 농담들밖에 할 수 없는 무지한 사람들을 그들 대신 보내어 사람들을 더욱 완전히 승려들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신적인 일반 사람들은 그러한 승려들을 지지하고, 법왕의 절대권을 인정하고, 성도를 숭배하고, 승려들에게 선물을 드리므로 종교적 의무를 완전히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함으로 천국에 들어가기에 넉넉한 자격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학식 있고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탁발승의 제도를 개혁하고자 수차 시도하였으나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민한 통찰력을 가진 위클리프는 그 제도 자체가 거짓된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선포하면서 악의 뿌리를 공격하였다. 토론과 의문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승려들이 법왕의 면죄부(免罪符)를 팔면서 각처로 돌아다니는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과연 돈으로 죄사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로마 법왕에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죄사함을 구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탁발승(托鉢僧)들의 탐욕에 놀랐다. 


그들은 “로마의 승려와 신부들이 암(癌)처럼 우리를 좀먹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면 백성들은 멸망할 것이다”(D’Aubigne, b.17, ch.7)라고 말하였다. 


구걸하면서 다니는 그 승려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감추기 위하여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백성들의 자선에 의하여 생활하였다고 주장하므로 그들은 구주의 모본을 따라가고 있노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주장은 그들의 사업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기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일보다 로마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바로 로마교가 숨기고자 하는 진리의 근원을 찾아 나아가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탁발승단을 반대하는 소책자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그들과 논쟁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을 성경과 그 저자 되시는 하나님의 교훈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법왕의 사면하거나 파문하는 권세가 보통 신부 이상의 권세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정죄의 선고를 받지 않는 한 아무도 참으로 파문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일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속박하기 위하여 법왕이 제정한 영적 및 세속적인 거대한 조직체를 파괴하는 데 있어서 더할 수 없이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개혁자 위클리프는 루터워드에 은거하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 법왕들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평화의 임금이신 예수님께로 돌리고자 애를 썼다.


온갖 투쟁과 타락을 자아낸 분열은 사람들로 하여금 법왕권의 진상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어 도리어 개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위클리프는 자기가 저술한 “법왕의 불법”이란 소책자에서 서로 상대편을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하고 있는 두 승려의 말이 참말인지 생각해 보라고 백성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악마와 같은 그들 중의 하나로만 통치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더욱 쉽게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둘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셨다”(R.Vaughan, Life and Opinions of John de Wycliffe, vol.2, p.6)고 말하였다.


위클리프는 그의 주님처럼 빈곤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루터워드의 교구 안에 있는 비천한 백성들에게만 빛을 전하는 것으로 흡족히 여기지 않고, 영국의 각 곳에 전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그 목적을 위하여 진리를 사랑하며 그것을 널리 증거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아끼지 아니하는 단순하고 경건한 선교사들로 구성된 하나의 조직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어느 곳이든지 가서 시장(市場)에서나 대도시의 거리에서나 시골의 길가에서 설교하였다. 

그들은 늙은이들과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은혜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위클리프는 옥스포드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서 그 대학의 강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의하였다. 

그는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에게 진리를 너무도 성실하게 소개하였으므로 복음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온 생애를 통하여 최대의 사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성경의 진리와 의미”라는 저서에서 자기가 성경을 번역하여 영국 국민으로 하여금 모두 자국어로 하나님의 놀라운 업적을 읽을 수 있게 할 뜻이 있다는 것을 표명하였다.



영역 성경의 완성


그런데 갑자기 그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아직 60세도 안 되었지만 끊임없는 수고와 연구와 원수들의 공격이 그의 기력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는 신속히 노쇠하게 되었다. 

그는 위험한 병에 걸렸다. 

이 소식은 탁발승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야 그가 교회에 대하여 범한 악행을 깊이 뉘우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자복을 듣기 위하여 그가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네 종교 단체에서 온 대표자들과 네 사람의 정부의 관리들이 임종이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는 그의 주위에 모여 있었다. 


“그대의 죽음이 임박하였으니 이제 과거의 모든 죄과를 뉘우치고 일찍이 우리에게 손해를 주기 위하여 말한 모든 것을 우리 앞에서 취소하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그 개혁자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시중드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침상에서 일어나, 신앙의 취소를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처럼 자주 떨게 해주었던 분명하고 큰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너희 탁발승들의 악행을 공개할 것이다”(D’Aubigne, b.17, ch.7). 


천만 뜻밖에 질책을 받은 승려들은 그만 놀라고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서 급히 나가 버렸다.


위클리프의 말은 성취되었다. 그는 로마를 대항하는 모든 무기 중의 가장 강력한 무기, 곧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들을 계몽시키고 교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성경을 자기 동포들의 손에 쥐어 주기까지 생명이 연장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업의 완성을 보기까지 여러 가지 큰 장애를 겪었다. 위클리프는 건강이 대단히 좋지 못하므로 자기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몇 년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았으며, 또한 반드시 반대를 만나게 될 것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허락으로 힘을 얻어서 그는 결코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지금껏 왕성한 지력(智力)과 풍부한 체험 속에서 그의 사업 중의 가장 위대한 사업을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하여 보호를 받고 준비하여 왔다. 


모든 그리스도교국이 온통 혼란 중에 빠져 있는 그 때에, 이 개혁자는 루터워드의 목사관(牧師館)에서 외부의 폭풍과는 상관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그 사업에 몰두하였다.


드디어 사업이 완성되어 최초의 영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국에 공개되었다. 


개혁자는 이제 감옥이든지 화형주든지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그는 결코 꺼질 수 없는 빛을 영국 국민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자기의 동포들에게 성경을 줌으로 무지와 죄악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것 이상의 것, 자기의 나라를 해방시키고 향상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전쟁터에서 빛나는 승리를 얻은 것보다 더욱 위대한 일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도 인쇄기가 발명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성경의 부수를 증가시키려면 더디고도 번거로운 수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성경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복사하는 일을 자원하여 담당하고자 했다. 


그러나 요구되는 만큼의 부수를 공급하기는 어려웠다. 


그 중에 돈이 많은 부자들은 성경전서를 사고자 욕망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일부분만을 샀다. 


많은 경우에, 여러 가정들이 합하여 성경을 샀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성경은 많은 사람들의 가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이성(理性)에 호소한 결과, 사람들은 법왕교의 교리에 맹종하던 상태에서 각성하였다. 


위클리프는 이제 개신교의 명확한 교리,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성경의 절대적인 확실성에 대하여 가르쳤다. 


성경을 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전도자들은 이 개혁자의 저서도 전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영국 국민의 약 절반이 이 새 신조를 받아들이게 되리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반대는 있었을지라도 얼마의 기간 동안 성경이 배포(配布)될 기회가 주어졌다.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개혁자의 소리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다시 음모를 꾸몄다. 

개혁자는 세 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