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와 김교신: 근대 조선에 있어서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 강유원
1 이 책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두 명의 조선 근대 기독교인들이 살아간 시대에서 그들이 가지게 된 사상과 벌였던 행위를 검토하고 있다. 저자가 이러한 검토를 수행하는 입각점은 “첫째, 전통적 가치를 어떻게 인식하고, 거기에서 미래에의 비전을 어떻게 끌어냈는가, 둘째로 그리스도교를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전통적 가치와 어떻게 결합했는가, 셋째로 구체적인 역사 현실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을 어디서 찾아내고 ‘신의 사랑과 정의’를 개인의 실존과 어떻게 결합하려 하였는가”이다. 일견 이러한 입각점은 구한말 기독교 수용과만 관련되어 있는듯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외래 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수용자와 그 사상의 관련을 탐구할 때 기본적으로 제기되는 물음들이다. 인용된 글에서 “그리스도교”를 다른 특정 사상으로 대체하면 그 내용이 확실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의 수용에 대해 물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가지고 사태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외래 사상을 수용하기 전에 수용자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수용자는 지배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전통적 사상과 그것의 핵심가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것을 삶을 규율하는 원리로서 승인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행위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중심 질서(심지어 우주적 원리로까지)로서도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지배적인 원리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조망하며, 수정, 더 나아가 철저한 전복을 시도하고 있는가. 둘째, 외래 사상을 수용하며, 그것의 핵심개념을 무엇으로 이해하며, 전통적 가치와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는가. 이는 첫째 물음의 ‘전통적 원리의 수정 또는 전복’과 관련하여 물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사상이 들어올 때, 그것의 전모가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설혹 그렇다해도 수용자는 자신의 관심과 목적 —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요구된다고 여겨지는 경향 — 에 따라 외래 사상의 특정 측면에만 주목할 수 있다. 이러한 특정한 주목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는 사상을 담고 있는 문헌을 번역한 결과물이다. 번역자는 원래의 책 제목을 수용자의 맥락에서 바꾸어서 펴내기도 하고, 특정한 개념을 수용자의 의도에 따라 미묘하게 바꾸어 번역하기도 한다(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책은 근대 일본에서 서양의 학술 개념을 번역할 때 거쳐간 경로를 더듬어본 ≪번역어 성립사정≫, ≪번역과 일본의 근대≫ 등이다).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있는 그대로 옮기기’란 애초에 가능치 않으며, 어떤 점에서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또한 수용자들 사이에서 ‘누가 더 원판을 제대로 받아들였는가’를 둘러싼 논란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일 수 있다. 셋째의 물음은 앞의 두 물음을 집약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것만 물으면 외래 사상의 수용과 관련된 것 전반을 집약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구체적인 역사 현실”이라는 부분이다. 유입된 외래 사상은, 외래 사상이 외래의 것인 한에서 즉, 그 사상 수용자의 구체적인 역사 현실에서 길어 올려진 것이 아닌 한에서 수용자의 구체적인 역사 현실과 합치되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찾아내었다해도 그러한 발견은 일종의 재해석이거나 아니면 외래 사상의 이름을 빌린 자신의 사상이다.
어쨌든 우리는 외래 사상의 수용과 관련하여 많은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토착화 — 또는 현지화 또는 완전 수용과 실존과의 결합, 그리고 그에 이는 재창조 — 작업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그 시간 동안 사회의 여러 제도와 요소들은 개입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리학을 도입했다고 알려진 고려 시대의 안향(1243-1306)과 조선 성리학의 절정을 성취했다고 알려진 이황(1501-1570)의 생몰연대를 거론하고 약 200여년에 이르는 이 기간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을 떠올리기만해도 이러한 토착화와 재창조의 어려움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까닭게 우리는 어떤 사상이 도입된지 많이 시간이 지났다해도 그것은 아직 넓은 의미에서의 도입단계에 있다는 것, 특히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 의해 수용되어 지배적인 사상으로서의 위치에 올라서고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닌 한, 그것이 현지화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며, 이것이 사상 수용을 고찰하는 기본적인 태도일 것이다.
2 한국의 기독교는 여전히 수용과 현지화의 과정을 지나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어떤 형태로 일단락을 맺게 될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다.1) 윤치호와 김교신은 이렇게 진행중인 사태에서 주목되는 사례들이다. 저자의 선행연구 정리에 따르면 윤치호는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조선의 근대화를 지향한 예언자적 존재로서, 인간과 사회의 그리스도교화를 통한 도덕적 순화를 지향한 그리스도교적 개화사상가로서, 또 사회참여의 신학의 선구자로서, 조선 그리스도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그리스도교적’ 개혁 사상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김교신에 관한 선행연구에서는 몇가지 논의거리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을 정리하면 “첫째로 김교신의 ‘조선산 그리스도교’는 토착적.민족적 그리스도교의 한 유형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그 논리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둘째로 지금까지의 연구는 김교신의 신앙적 논리였던 무교회주의적 특질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았는데, 김교신이 이해했던 무교회주의는 무엇이었는가, 나아가 무교회주의와 ‘조선산 그리스도교’와는 어떤 내적 연관을 갖고 있는가 등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진화론과 국가사상의 맥락에서 이 책을 읽기 때문에 김교신은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없으며, 윤치호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만 검토한다.
3 앞서 보았듯이 저자가 정리한 선행연구들에 따르면 윤치호는 한반도 근대사에서 기독교가 펼쳐보인 긍정적인 측면 거의 전부를 대표하는 이로 평가되는 듯하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평가들과는 달리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적 전환 과정을 검토한 다음, 그를 “’제국주의적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죽음’의 유형을 대표하는 전형”으로 보고 있다.
당연하게도 윤치호는 전형적인 조선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세계관인 ‘화이(華夷)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윤치호는 2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통해서 일본이 청나라에 비해 ‘100배 이상’ 문명화된 나라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에게 화(華)는 이제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 되는 것이다. 사실 화이적 세계관은 중국이 무조건 ‘화’라는 관념 위에 구축된 세계관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었므로 이러한 변화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화는 본래 도덕적 교화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므로 서구 물질문명을 기준으로 삼아 화를 규정하는 것은 레토릭의 변화는 없다해도 전통적 가치의 근본적인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윤치호의 가치관 전도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는 전통적 가치관에 변형을 가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될 것이다.
그가 일본을 청나라보다 문명화된 나라라 본 것은 일본 메이지 정부가 전면적인 서구화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윤치호의 눈에 진정한 문명은 서구이며, 당연히 서구가 진정한 ‘화’가 된다. 그는 서구의 자본주의적 국제질서를 도의적인 것으로 인식했으며, 영어학습에도 힘쓰게 된다. 그가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 여전히 유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이 시기의 그의 세계관 전환은 이미 향후의 전개 방향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전환은 미합중국을 경험하고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완성된 형태를 띠게 된다. 그렇지만 그 구성요소나 구체적인 내용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화이적 세계관이 가지고 있던 이분법적 사유방식의 틀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가지고 있던 화이적 세계관은 강대국/약소국, 서구적인 것/비서구적인 것, 지배/복종, 약탈/피약탈, 기독교/이교도 등을 요소로 하는 세계관으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윤치호가 유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미합중국에서의 경험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비서구사회가 서구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 열등한 자에 대한 차별과 정복은 신의 뜻에 합당하다는 것(비적자非適者 배제론) 등의 신념을 갖추게 되며, 이로써 “서구 문명의 원리를… 모든 문명이 추구해야만 할 진정한 가치로 수용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관을 철저히 전향”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전향하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결정적인 회심의 체험을 통해 의심을 해결한 뒤의 신앙고백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유교적 가치관에서 생겨난 “윤리적 자기 완성이라는 열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유교는 세련되고 이성적 합리적 체계이기는 하나 실천에 관한 강한 압박을 가하지 않는다. 반면 기독교는 내세의 구제를 위한 조건으로서 자기 완성을 인간에게 강제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신에 대한 그의 초기 이해는 “윤리적인 자기 완성의 주체인 인간에게 힘을 빌려주는 하나의 선한 주술적인 힘과 같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윤치호의 세계관에 있어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해진다. 기독교의 신은 근대 산업문명이라는 지고의 가치를 수호하는 신이고, 그에따라 기독교를 믿는 사회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산업 문명의 사회가 되어 점점 더 진보.발전하게 된다. 또한 세계의 역사는 적자 생존의 원리에 따라 신적인 목표를 실현해가는 무대이다. 이는 바로 윤치호가 19세기말 서구 산업문명의 종교로서 제국주의적 세계지배를 정당화한 기독교와 사회진화론의 결합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정립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가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구상했던 조선사회 개조에 관한 생각들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윤치호의 조선 문명화 구상의 최초의 핵심은 강력한 계몽군주 중심의 체제 구축이었다. 이는 “강력한 무력에 의해 지지되는 군주가 주체가 되어 우민에 불과한 민중을 적대적으로 관리해서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로부터 강제적으로 신속하게 추구한다는 ‘계몽적 전제 군주국가’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윤치호는 나폴레옹이나 프리드리히 대제, 무솔리니 등을 존경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가까운 존재로 느끼고 경의를 표한 인물은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었다. 그런데 구한말의 상황에서 이러한 구상은 실효성없는 것임이 분명했고, 이를 깨달은 그는 문명화의 주체를 외부에서 모색하기 시작했다. 즉 선한 구세주 역할을 할 수 있는 문명국을 선별해서 그들에게 조선 개혁을 위한 강력한 개입을 요청한다는 것이고, 그가 “먼저 그것을 기대한 것은 일본이었다.” 그렇지만 민비 시해 사건 이후에는 당시 조선에서 일본과 주도권 쟁탈을 하고 있던 러시아에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러시아에 대해 지속적인 기대를 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자 그 상황에 철저하게 적응하고 그에 대한 정당화를 마련한다. 그는 “일본에 의한 조선 식민지화를 조선인이 가진 ‘노예 근성, 부정직함, 죽은 자 같은 무기력성’에 근거한 자기 개발의 실패에서 오는 당연한 ‘죄에 대한 벌’로서 해석했다… 식민지화에 대해서 민족적 갱생을 위한 훈련기간으로서의 의의를 부여했다.”
윤치호의 정당화는 ‘105인 사건’을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다. 그때 이후 그는 ‘강함’ 자체를 최상의 가치로 정립한다. 이때부터 그의 친일은 정복과 지배의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목적을 거침없이 실현해가는 강자 일본과의 합일이라는 가치관에 근거한다. 전통적 화이적 세계관, 기독교의 형식적 수용과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에 이어 이제는 철저한 내선일체(內鮮一體)가 그의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미래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조선 민족을 ‘발전적’으로 해체해서 ‘유능한’ 조선인은 일본에 편입해서 자기상승을 실현하는 것이… 이상적인 ‘내선일체’”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때에도 그에게 기독교는 최초의 문명화 구상 단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사회적 영역과 분리된 사사적(私事的)인 영역에만 관여하는 것이었기에 실질적인 무게를 갖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기독교는 신의 정의라는 측면이 배제된 상태에서 수용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현실의 불의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었으며, 결국 신이라는 개념 자체도 텅빈 것이 되어, 무조건적 정서적 합일의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였다.
4 윤치호는 해방 공간에서 친일파로 고발당했고 자살로써 삶을 마감하였다. 이로써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단죄는 어느 정도 마무리된 듯하다. 그러나 몇가지 남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윤치호가 전통적 가치관을 버리고 서구의 가치관을 받아들인 과정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도 그리 낯선 경우가 아니다. 현대의 한국인들 중에 그와 유사한 인물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독교를 신봉하고 기독교의 신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며, 외국의 학술이론으로써 문명화 구상의 뼈대를 삼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다. 심지어 외국의 학술이론을 누가 더 잘 알고 있는가를 놓고 공개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며, 그것을 지성인의 척도로 삼는다. 또한 공직자들은 미합중국에 유학하여 정책수립과 결정에 관한 공부를 연마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미합중국을 닮아갈 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정책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과연 오늘날의 이러한 행태들과 윤치호의 그것은 얼마나 다른가. 딱 부러지게 답하기 어렵다.
윤치호가 전통적 가치관을 버리고 서구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면 과연 그가 수백년을 이어온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나 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후마 스스무의 < <연행사와 통신사≫(신서원)를 읽어보면 조선의 연행사들은 중화(中華)에 가서도 자신들의 자부심 — 시대착오적인 주자학 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 을 거침없이 드러내 보이며, 일본에 간 통신사들은 소중화(小中華)로서의 강한 우월감을 보여준다. 당장 유길준의 < <서유견문≫만 보아도 전통적인 문명의 기준이 거부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윤치호 — 그리고 그와 동시대의 다수 지식인들 — 의 이러한 전향을 가져다 준 결정적인 계기들은 무엇이었을까.
마지막으로, 앞서도 언급했듯이 아직은 도입 단계를 거쳐가고 있는 기독교가 앞으로 어떤 모습의 정착될 것인지, 그리고 기독교에 비교하면 굉장히 미약한 차원에서 수용되고 있는 외래의 사상들이 얼마나 생존할 것인지 등을 흥미있게 지켜보는 것도 의의있는 일일 것이다